호박죽
또박
며칠 전 여자친구와 여기저기 드라이브를 다니다가 문득 따듯한 호박죽이 먹고 싶다는 그녀를 위해 시장으로 향했습니다. 동문시장, 도남시장, 여기저기 시장을 돌아다녀봤지만 놀랍게도 호박죽을 파는 곳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제주에서는 호박죽을 잘 먹지 않는 것 같더군요. 본죽이나 죽이야기에서는 단호박죽만 판매하고 우리가 원하는 슴슴한 늙은 호박죽은 없었습니다. 왜 그런지 궁금해서 챗GPT에게 물어본 결과 기후적으로 벼농사가 어려운 지역이라 쌀을 이용한 죽의 발전은 미비한 편이라는 답변을 얻었습니다. 아무튼 저에게는 아직 9개의 호박이 남아있으니 호박죽을 끓여야겠습니다. 지난번 호박피자는 이번 겨울 한정메뉴로 내놓을 생각인데 만약 계획이 무산되면 호박죽을 잔뜩 끓여 당근에 팔아야겠습니다.
재료(5인분)
늙은 호박 1개 (손질 후 약 1.3kg)
찹쌀가루 150g
물 85g
찰밥(또는 찹쌀밥) 300g
만들기
1. 호박을 반으로 갈라 속과 껍질을 제거한 뒤 호박이 잠길 정도로 물을 넣고 삶아줍니다.
2. 찹쌀가루 150g에 미지근한 물 85g을 넣고 반죽을 해줍니다.
3. 먹기 좋은 크기로 소분해 둥글게 말아 둡니다.
4. 끓는 물에 소금을 조금 넣은 뒤 반죽한 새알심을 넣고 익혀줍니다.
5. 동동 떠오르면 건져내어 찬물에 식혀 한쪽에 잘 보관해 둡니다.
6. 호박이 푹 익혀지고 물이 자작해지면 찰밥 300g을 넣고 한소끔 끓여줍니다.
7. 6을 믹서에 갈아 취향에 맞게 소금과 설탕(꿀)을 넣어 간을 맞춰줍니다. 저희는 소금으로만 간을 했는데도 쌀과 호박의 달콤함으로 충분히 달달한 결과물이 나왔습니다.
준비해둔 새알심을 죽에 넣어 따듯하게 데워준 뒤 그릇에 담아냅니다.
느낀 점
이번 호박대란을 겪으며 늙은 호박은 참 기분 좋은 식재료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시골의 정취가 느껴지는 은은한 향에 어린 시절 할머니댁에 놀러 가면 언제나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던 덩치 큰 호박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먹을 수 있는 식재료라는 사실은 한참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었을 정도로 그 호박은 식자재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무겁고 덩치 큰 호박을 굴리며 놀기도 하고 거실에서 TV를 시청할 때 배게 대신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 시골의 이야기 한 구석에서 조용히 배경으로, 조연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번 할로윈 때 아이들을 위해 데려온 수십 개의 호박은 도화지가 되기도 무서운 유령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 역할을 다한 호박에게 존중을 담아 차근차근 숨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죠. 이건 호박을 위한 장례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