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로미티로 가는 길
우리는 웨르펜웽을 벗어나서 돌리미티를 향하였다.
그런데, 내비게이션 경로를 보면 인스부루크를 거처 도착하게 하는데, 이경로가 빠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도로는 분명 아우토반인 것 같았다. 대신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경로는 거리로는 가까운데, 무언가 속도를 낼 수 없는 도로였던 것 같았다.
우리는 돌아올 때는 인스브루크로 빠른 경로를 통해 도착하겠지만, 돌로미티로 가는 길은 거리는 짧지만 시간이 걸리는 여유 있는 길이라고 생각되는 경로를 선택했다.
우리는 비록 시간적으로 늦는 길이지만 고속도로처럼 단조롭지 않은 길로 가기로 하고 출발하였다.
실제로 길은 매우 좁았고, 우리는 산맥 사이 길과 자연을 가로질러 이탈리아 국경이 보이는 길로 접어들었다.
우리는 1차선 도로를 지나면서 이탈리아 국경 마크를 보게 되었다. 이곳을 지나면서 구불구불한 1차선 도로를 지나면서 오토바이 차량에 양보를 하면서 내려왔다.
그런데, 놀랐던 것은 내려와서 보니 길이 마무리되는 반대편으로 긴 줄이 있었다. 이들은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로 가기 위해 대기하는 줄이었다.
그 길은 일방향이 아니고 2방향이었던 것이다.
한쪽이 내려오면 다른 쪽은 기다리고 있다가 상대편에서 모두 내려오면 올라간다.
우리는 운이 좋게 내려가는 때에 잘 맞추어 오스트리아에서 이탈리아 방향으로 산길을 내려갈 수 있게 되었다.
체코에서 오스트리아로, 다시 오스트리아에서 이탈리아로 가면서도 어떤 경계를 만나지도 못했다. 그러던 중 오스트리아에서 이탈리아로 넘어가는 산길에서 내려가는 EU기내에 이탈리아라고 쓰여있는 모습에서 이곳이 국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경을 지키는 군인도 없고, 사무소도 없다. 그냥 우리나라에서 지역 경계선을 지나면서 보는 ‘여기는 경기도입니다.’ 간판 정도이다.
이곳을 지나면서 우리는 EU라는 유럽연합이 개별 나라별 정치제도는 다르지만,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나라처럼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의 분단의 현실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그러나, 유럽처럼 자유로운 나라 간 통행자유는 그저 한순간 얻어진 전통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변혁을 위해 많은 이들이 희생한 결과였다고 한다.
리베카 솔닛 걷기의 인문학이라는 저서에서는 우리가 이처럼 자유롭게 알프스를 넘나드는 것이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 결성된 보행 커뮤니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들 보행 단체는 정치성을 띄고 있었고, 당시 주류사회에 대한 반대 속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들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지역에서 활동하는 나투르프로(자연친구:Naturfreunde)라는 단체로서 알프스 사유 목장, 사유 산림의 출입통제에 대해 반대 운동을 펼쳤고, 출입할 권리를 보장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들 단체는 나치 시절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사회주의 성향 때문 탄압을 받고, 미국에서는 독일적 특성 때문 의혹을 샀고 이후에서는 매카시즘에 의해 탄압받았다고 한다.
과거 유럽 사회에서는 걸을 수 있는 땅을 확보하는 일이 계급투쟁의 성격을 뗬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땅을 가진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은 땅을 확보했고, 외부인의 출입을 막았고, 만일 자신의 땅에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가혹한 처벌이 있었다고 한다.
결국 이에 대한 저항이 법률을 만들고 통행의 자유를 쟁취해 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유럽 사회에서 보행 단체는 하이킹으로, 하이킹은 캠핑으로 변화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여행 중 유럽 도로에서 만났던 수많은 캠핑카는 그런 역사적인 맥락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 현실을 되돌아보면 남과 북이 막혀있는 현실이 너무 당연시되어있다.
돌아가신 아버지 고향인 황해도 연백군 용도면 천태리 416번지.
아버지는 생전에 고향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시던 아버지와 고모는 황해도에 계시던 할머니와 어느 순간 38선은 무심하게도 가족을 갈라놓았다고 하신다.
그렇게 항상 명절 때마다 그렇게 강하신 아버지께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아야 했다.
유럽의 여러 나라 사람들이 정치제도와 상관없이 이동 자유가 주어지기까지 많은 희생이 있었듯이 우리에게도 통일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정도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유럽과 마찬가지로 시대적인 편견과 맞서야 하는 숙명이 있어야 하는 것일지 모른다.
얼마 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DMZ 평화 손잡기 행사가 있었다. 이 땅의 분단에 대한 시민사회 각성이었다.
우리 가족 역시 행사에 참여하면서 유럽에서의 자유로운 국경에 대한 경험을 생각해 보았다.
그들 역시 여러 나라가 하나의 나라처럼 왕래하기까지 많은 정치 사회적 각성이 있었다고 보인다. 특히, 유럽의 동, 서독이 통일하던 시점이 유럽 연합이 형성되는 시점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한국에서 남북 평화 통일 또는 최소한 남북 연합국가가 되는 길을 위해서는 동아시아의 평화적 분위기 형성이 중요하다.
우리에게도 그런 변화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