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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양 Oct 04. 2023

아빠는 항암치료를 받기로 했다

산대장 아빠의 암 투병기



2020년 10월 21일 

췌장암 4기에 간으로 전이까지 된 상황에서 선택지는 딱 하나 밖에 없었다. 

바로 항암치료.


아빠를 만나기 위해 아침부터 아산병원으로 향했다. 아산병원으로 가는 길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어제 밤, 수화기너머로 울먹이던 아빠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평생을 무쇠처럼 단단히 살아 온 우리 아빠, 고목나무처럼 가족을 든든하게 바치며 약한 모습 보인 적 없던 우리 아빠. 우리 아빠가 무너져 내렸다. 


우리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아빠가 슈퍼맨처럼 다 해결해줬는데 어디든 다 달려갔고 무엇이든 다 해결했는데 그랬던 슈퍼맨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이제는 내가 해야만 했다. 33년 평생 받은 아빠의 보살핌을 내가 돌려줄 때가 된 것이다. 마음을 다잡으며 병원 로비로 들어섰다.


잠시 후, 병실에 있던 아빠와 엄마가 내려왔다. 하루사이에 얼굴이 많이 수척해진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제 검사 결과를 듣고 아빠는 물론, 엄마도 밤새 한 숨도 못 주무셨다고 했다. 아빠는 끝까지 '췌장암이 오진이길' 바랬는데 오진은 커녕, 더 큰 병이 되어 돌아왔으니 그 상실감을 감당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엄마도 견딜 수 없었단다. 두 분은 새벽 내내 병실을 벗어나 병원 지하에 있는 간이 의자에 앉아서 뜬 눈으로 밤을 샜다고 했다.


이제 아빠는 췌장암 수술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췌장암 명의라고 불리는 외과 교수님의 손을 떠나 종양내과 교수님으로 담당이 바뀌게 되었다. 종양내과 교수님과 만나서 앞으로의 항암 일정을 상의하기로 했다. 오전 7시부터 오후 3시까지 반나절을 기다렸건만 교수님은 올 생각이 없었다. 나는 기다리다 지쳐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내가 집으로 가야 부모님이 한 숨이라도 주무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아빠, 엄마와 인사를 하고 병원을 나서려는데 회전문 앞에서 나를 바래다주던 아빠의 눈에 갑자기 눈물이 차오르더니 이내 왈칵 쏟아져내렸다. 딸 앞에서 애써 담담한 척, 괜찮은 척 했던 아빠의 눈물이 결국 터지고 만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아빠의 눈물에 나도 울고 엄마도 울고 우리 가족은 셋이 엉엉 울어버렸다. 병원 입구에서 눈물만 흘리는 우리 가족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어찌나 측은하게 바라보던지... 어렵사리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저녁, 종양내과 교수님이 아빠 병실을 찾아왔다.나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남편과 함께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그리하야 저녁 9시에 가족 비상 소집이 이뤄졌다.


종양내과 교수님이 아빠를 찾아와 항암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고 했다. 현재 췌장암 4기, 다발성 간 전이가 된 상태이기 때문에 표적항암을 통해 간에 전이 된 암세포를 없애고 암세포 크기를 줄인다고 했다. 만약 크기가 줄어들기만 한다면 아빠에게도 희망이 있다고 했다. 원발암이 췌장 꼬리에 있기 때문에 항암을 통해 암의 크기가 줄어들면 원발암 부분인 꼬리만 톡 잘라내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항암을 최대한 열심히 받아보자고 했단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항암을 하려면 적어도 2주에 한 번은 서울 아산병원에 와서 항암주사를 맞아야 하는데 부모님은 진해에 살고 있기 때문에 서울에 있는 아산병원까지 항암을 하러 왔다갔다 하면 왕복하는 시간만 거의 8시간이 넘게 걸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수님은 체력적으로나 금액적으로 무리가 아니겠냐며 꼭 아산병원에 아니어도 창원, 부산에서도 항암을 할 수 있으니 잘 생각해보시고 어떻게 할 건지 알려달라고 하셨단다.


사실 많은 항암 환자들과 가족들이 고민하는 부분일 것이다. 우리 부모님의 거주지는 경상남도 진해인데 서울까지 KTX 왕복 티켓값만해도 1인당 약 10만 원. 그런데 이 항암을 2주에 온다고 치면 한 달에만 40만 원이 드는 것이다. 금액도 금액이지만 환자가 매번 항암을 받으러 올라오고, 항암을 받고 내려가야하는 그 고생스러움이 더 큰 문제였다. 서울에서 창원까지 3시간동안 기차를 타고 창원에서 진해까지 30분동안 차를 타고 가야 한다. 도합 7시간에 가까운 시간동안 이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환자의 의지가 없으면 분명 힘든 여정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가 이왕이면 대한민국에서 암 치료로 가장 유명한 서울 아산병원에서 항암과 수술을 진행했으면 싶었다. 아산병원에서 진단까지 받은 마당에 이곳에서 결판을 내고 싶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아빠. 저를 이기적인 딸이라고 생각해도 좋아요. 근데 저는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어요. 저는 아빠가 암을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해요.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병원에서, 좋은 환경에서 치료받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서울 아산병원에서 항암 받는 건 어때요?"


다행히 엄마도 남편도 오빠도 모두 같은 의견이었다. 우리는 아빠를 설득했고 아빠는 우리의 설득에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을 내리자마자 모든 일이 속전속결로 풀렸다.


항암을 하기로 결정되면 먼저 케모포트 시술을 받는다. 항암 주사를 맞을 매번 바늘로 혈관을 찌르면 혈관이 망가질 있기때문에 쇄골 쪽에 케모포트라는 고정식 링거 바늘을 심는다. 케모포트 시술까지 끝내고 나니 아빠에겐 드디어 퇴원 명령이 떨어졌다. 사실, 케모포트 시술을 하고 바로 항암 주사를 받으면 좋았겠지만 이미 항암 진료 예약을 한 환자가 앞에 수십명이었다. 아빠는 2주 뒤에 첫 항암을 시작하기로 했다. 


얼떨결에 서울에 올라와 얼떨결에 입원을 하게 되고 얼떨결에 췌장암 4기 진단을 받게 된 아빠.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지만 이제는 짐을 싸들고 집으로 내려 갈 시간이었다. 아산병원에 발을 디딜 때만 해도 '내가 설마 암 환자일까?' 했지만 이제는 확실하게 '암 환자'가 되었다. 단 며칠 사이에 아빠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어버렸다. 


기차역으로 가는 택시 안. 케모포트가 아빠의 왼쪽 쇄골에 심어졌는데 안전벨트를 한 곳에 자꾸 닿여 아빠가 불편해했다. 그 불편함과 이질감을 느낄 때 마다 아빠도, 우리도 '암'이라는 현실을 다시금 되새길 수 밖에 없었다. 아빠는 기차역으로 가는 택시에서 우리에게 말했다. 


"사실 나는 췌장암이라고 얘기를 들었을 때 그냥 치료 안 하고 포기하려고 했다. 근데 너희들이 이렇게 간절하게 이야기하고 아빠를 위해서 뛰어다니고  애쓰는 모습을 보니까 내가 여기서 포기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드네. 힘들어도 아빠가 열심히 해볼게! 이겨내고 꼭 완치할게!' 


그렇게 아빠는 진해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전과는 180도 달라진 몸과 마음으로 더없이 무거운 표정으로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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