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쉬웠다. 암에 걸리고 암을 이겨내고 눈물젖은 에필로그를 맞이하는 그들의 스토리는.그래서였을까, 나에게 '암'은 드라마 영화 속에 나오는 허구의 존재였다. 이 세상에 실존하지 않을 것 같은, 판타지 소설 속에 나오는 마법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내 눈과 귀로 "암입니다"라는 말을 듣게 되다니... 사실 아빠가 췌장암이라는 건 여전히 실감나지 않았다.
정밀검사를 하기 위해 대학병원에 입원했다. 아빠는 입원하면서도 내심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에이, 내가 설마 암이겠어? 창원 병원에서 잘못 검사 한 걸거야. MRI기계에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거야'
10월 16일 아빠가 아산병원에 입원하던 날
10월 16일 금요일에 아빠가 입원하고 아빠는 각종 검사를 받았다. PET CT, 암 조직검사, 복부 CT 등등 3일 동안 끝없는 검사를 받았다. 서울에 함께 올라 온 엄마가 보호자로 상주하며 아빠 곁을 지켰다. 계속되는 검사, 금식, 검사, 금식에 아빠는 점점 지쳐갈 법도 했지만 산대장 아빠의 타이틀에 버금가는 체력과 정신력으로 아빠는 이대로 병실에 누워있을 수 없다며 틈틈이 운동을 시작했고 링거줄을 꼽고 병원 계단 15층을 매일같이 새벽, 아침, 저녁으로 뛰어다녔다.
한 번은 간호사가 아빠 팔에 주사를 놓으려고 하는데 팔뚝에 뭔가가 불룩 튀어나와있어서 '어머? 여기 뭐가 잘못됐나요?' 라고 놀랐는데 알고보니 아빠의 근육 알통이었다. 간호사들은 아빠보고 '제발 가만히 계시라고. 더 안 좋아지면 어쩌시려고' 하면서 운동을 말렸지만 그때까지도 아무런 통증과 증상이 없었기에 아빠는 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끝없는 검사가 끝나가고 드디어 담당 교수님께 검사 결과를 듣는 날이 찾아왔다.
2020년 10월 20일
오늘은 유달리 아빠의 기준이 좋았다. 오전에 복부 엑스레이 검사가 끝나고 간호사한테 이제 더이상 검사가 없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아빠는 간만에 샤워도 말끔하게 하고 따스하게 내리쬐는 가을 햇살을 받으며 엄마와 함께 병원 앞 산책로를 걸었다. 아빠는 모처럼 기분이 좋아보였다.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고 그야말로 운수 좋은 날인 것 같다고 했다.
이제 남은 건 교수님이 검사 결과를 들려주는 것, 우리가 바라는 건 딱 두 가지였다. 췌장암이 맞다면 수술이 가능하길. 그래서 췌장암 명의 교수님께 빨리 수술 받을 수 있길, 설마설마하는 마음이지만 췌장암이 아니길, 췌장염과 같은 염증을 암으로 잘못 판단한 것이길.
그런데, 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처럼 한 순간에 행복했던 하루가 최악의 하루가 되어버렸다. 오후 6시에 걸려 온 엄마의 전화가 그 신호탄이었다.
"딸아, 내일 아침 일찍 병원에 와야겠다"
"왜요? 검사 결과가 나왔어요?"
"지금 결과고 뭐고... 큰일났어 큰일..."
맨 처음, 엄마에게 '아빠가 췌장암일지도 모른대' 라며 걸려왔던 그 전화처럼 수화기너머로 엄마의 목소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교수님이 방금 와서 결과를 알려줬는데...췌장암 3기인 줄 알았는데 췌장암 4기래, 거기다가 간 전이까지 됐대. 어떡하니"
처음 아빠의 암 진단을 받았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한 충격은 없을 것만 같았다. 이미 무너져 내렸다고 생각했고 더 이상 무너질 곳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더 깊은 구멍이 남아있었다. 아직도 우리 가족은 더 무너져내릴 곳이 있었다. 췌장암 3기 혈관침윤으로 알고 수술이 가능할거라 기대했지만, 병원에 입원하고 검사하는 3~4주 사이에 암세포는 더 커져서 이제는 췌장암 4기에 다발성 간 전이가지 된 상태라고 했다.
한 마디로 수술 불가능이었다. 췌장암은 수술을 못 하면 생존률이 극히 드물다는데, 항암만 해서 완치한 사례가 거의 없다는데, 그렇게 부정적인 생각은 나를 점점 옥죄었다. 손발이 덜덜 떨리고 눈물이 쏟아졌다. 우리 아빠가 췌장암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더이상 영화, 드라마가 아니었다. 내가 느끼는 이 감정, 떨림, 그리고 슬픔은 지극히 현실이었다. 엄마한테 소식을 듣자마자 아빠에게 전화를 했다. 이 순간 가장 놀라고 무서운 건 아빠일 것이다.
"여보세요....."
췌장암을 선고받고 서울로 올라오고 우리 가족은 참 많이도 울었다. 울만큼 울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빠의 목소리에 또 다시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하늘이 무너지고, 바닥이 무너진다고 해서 마냥 무너지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평정심을 되찾고 아빠에게 물없다.
"정확히 어떻게 된 거예요? 교수님이 뭐래요?"
"오늘 조직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간으로 전이가 됐대. 근데 여러군데 전이가 됐나봐. 그래서 항암치료를 하고 수술을 하자네"
"항암은 어떻게 진행한대요?"
"종양내과에 이야기를 해놨으니까 내일 담당 교수가 와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 스케쥴을 알려준대"
"알겠어요. 내일 아침에 병원 갈테니까 그때 보고 얘기해요"
"그래. 딸아, 아빠가 눈물이 나고 슬프긴 하지만 이겨내기로 마음 먹었으니까 너무 슬퍼하지마라. 아빠는 무조건 이겨 낼 거다. 파이팅!"
전화를 끊고 나서야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운다고 해결 되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아빠는 췌장암 4기, 간 전이 환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