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대장 아빠의 암 투병기
2020년 9월 28일
아빠의 MRI 검사 결과를 듣는 날이 왔다. 엄마와 오빠는 아침 일찍 아빠를 만나러 병원에 갔다. 나는 서울에 살고 있는데, 괜히 나까지 내려가서 부산을 떨면 없던 암도 생겨버릴까봐 무서운 마음에 내려가지 못했다. 그렇게 전화기를 붙들고 엄마의 연락만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전화가 걸렸왔다. 아빠였다.
"딸아~ 의사가 MRI 사진을 보여줬는데 췌장 꼬리 색이 까맣고 이런 경우에는 암일 가능성이 높다네. CT도 그렇고 MRI도 그렇고 췌장암이 의심이 된다네. 근데 아빠는 췌장은 물론이고 복부, 등에도 통증도 없고 아~~무런 증상이 없다. 소화도 잘 되고 황달도 없고! 그래서 내가 통증도 없고 괜찮다고 하니까 의사도 이상하다 싶은지 의료진끼리 회의를 해서 정확하게 결과를 알려준다네. 추석 지나면 2주정도 뒤겠다. 그때 돼서 같이 결과를 듣던지 하자. 걱정마라 딸아! 아빠는 아무렇지도 않다~!"
아무렇지 않다고는 말 했지만 아빠도 내심 놀랬을 거다. 평생을 큰 병없이 살아왔는데 갑자기 '암일수도 있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하지만 우리가 보통 아는 암환자들은 정말 아프고 고통스럽던데, 아빠는 겉보기에도 멀쩡하고 통증도 없었다. 만약 종합검진을 받지 않았다면 아프다는 사실조차 의심이 안 될만큼 이상이 없었다. 아빠의 이런 모습에 의사도 뭔가 이상했는지, 의료진과 회의를 해보겠다고 했고 그렇게 우리는 2주 동안 초초한 마음으로 기다려야만 했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진작 짐싸들고 서울에 있는 메이저 병원으로 달려갔어야했다. 하지만 사람은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일수록 '에이~ 아닐거야'라고 생각한다. 우리 아빠도, 우리 가족도 그랬다. '설마 암이겠어? 한 번도 아픈 적이 없었는데? 에이 아닐거야'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절대 췌장암이 아닐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나는 조금은 초초했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췌장암 명의들을 검색해보고 10월 중에 진료가 가능한 날짜로 먼저 예약을 했다.
2주라는 시간을 기다리면서 엄마와 아빠는 대판 싸우기도 했다. 어느날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딸아! 아빠 때문에 못 살겠다. 아빠가 자기가 죽으면 뒷산에 유골을 뿌려달랜다. 이게 말이가 막걸리가!'
사실은 이러했다. 아빠가 입원해서 MRI검사를 한 날. 의사가 밤에 몰래 찾아와서 아빠한테 그랬단다. '췌장암일 가능성이 매우 크니 마음의 준비를 하세요' 그때부터 아빠는 인터넷에 췌장암을 검색해보셨다고 했다. 인터넷에 췌장암을 치면 '생존률 5%' '췌장암, 죽음의 암' 이런 키워드가 대부분이다. 췌장암에 걸리면 생존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고 수술을 한다한들 예후도 좋지 않아 대부분 사망한다는 것이다. 대체 누가 췌장암을 생존률 5%라고 이야기 한 걸까. 자극적이고 눈길을 끄는 키워드를 만들고 싶었던 마음은 알겠지만, 췌장암 환자들이 느낄 절망감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던걸까? 아빠 역시, 이 글을 읽고 '난 죽겠구나'라고 생각했단다.
그래서 엄마한테 죽네, 마네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했다.
그렇게 2주가 흘렀다.
2020년 10월 12일
나는 전날부터 고향으로 내려갔다. 내일은 아빠가 검사를 한 병원에서 최종 병명을 알려주기로 한 날이기 때문이었다. 마음속으로는 아빠가 이미 췌장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피할 순 없었다. 비극을 마주해야 살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진료실에 들어갔다. 교수님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아버님...... 췌장암 3기입니다. 혈관침윤 된 상태인데 아직 전이는 안 되어서
다행히 수술은 가능해보입니다. 빨리 큰 병원으로 옮겨서 수술을 하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정말 드라마 같은 일이었다. 내 눈앞에서 우리 아빠의 암 선고를 듣게 되다니.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암입니다' 라고 선고하면 가족들이 새파래진 얼굴로 흐느끼던데 실제로 암 선고를 듣고 나면 눈물이 흐를 정신도 없었다. 내 머릿속엔 '빨리 대학병원으로 가야해!'라는 생각 뿐이었다.
진료실을 나오고, 아빠는 대기실 의자에 앉아서 가만히 땅만 바라보셨다. 고목나무같이 단단하고 굳세였던 우리 아빠, 무릎 위에 올린 양 손을 꽉 쥐더니 눈가가 촉촉해졌다. 태어나 처음보는 아빠의 눈물. 하지만 그런 아빠의 모습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릴 시간이 없었다. 빨리 대학병원에 전화해서 미리 잡은 진료 일정을 하루라도 당겨야했다. 먼저 예약했던 서울아산병원과 서울연세세브란스 병원에 전화를 했다. 다행히 아산병원의 김송철 교수님이 내일 모래 진료가 가능하다고 했다. 필요한 서류들을 메모하고 병원을 뛰어다니며 서류들을 챙겼다.
엄마와 아빠는 넋이 나간 것 같기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기했다. 우리 아빠는 참 이성적인 사람인데, 가족들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곧바로 행동하는 행동파인데, 항상 든든한 어깨로 우리들을 지켜주던 사람인데...아빠는 지금 이 순간 하염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나는 이때만해도 우리 가족이 이만큼 무너졌으면 됐지 싶었다. 췌장암 3기보다 더 무너질 곳이 어디있겠는가.하지만 우리 가족에겐 아직도 더 무너질 구멍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