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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양 Nov 24. 2023

항암치료 1년 7개월, 그리고 벼랑 끝

산대장 아빠의 암투병기




2022년 3월 18일 


2022년 2월 23일. 아빠는 이날 한 통의 전화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교수님의 연락이었다. 3차 오니바이드 항암제에 내성이 생겼지만 병원에서 임상실험을 하는 게 있으니 한 번 신청해 보라고 적극 권유하셨었다. 그리고 만약 대상이 되면 새로운 항암제를 써볼 수 있으니 희망을 가져보자고 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두 손 모아 기도하며 병원의 연락만을 기다렸다. 


사실 이 시기에 항암을 쉬면서 가족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참 많이 했다. 남들은 항암치료받고 보조치료도 많이 한다던데 비타민주사나 면역주사, 고온치료 등 이런 걸 받아볼까 아빠에게 권유해 봤지만 아빠의 신념은 한결같았다. '병원이 하자는 대로 하자, 교수님이 하자는 대로 하자.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훨씬 많이 배운 사람들이니까 믿고 가자' 라며 이왕 항암치료를 시작한 거 괜히 다른 치료를 받다가 잘못되지 말고 이왕 결심을 했으면 한 가지 치료에 전념하자는 것이었다.


아빠의 소식을 들은 주변 지인들은 아산병원만 고집하지 말고 항암치료를 하는 다른 대학병원을 가보라고도 이야기했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새로운 병원에 가면 CT부터 PET-CT, MRI 검사를 다시 해야 하는데 그 기간만 어림잡아 2~3주가 걸렸고 그동안 아빠는 아무런 항암치료를 받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고생해서 검사를 받았는데 결국, 항암치료를 못합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다시 원래 진료를 받았던 아산병원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동안 진료가 밀리고 또 대기를 해야 하고 그렇게 한 달이라는 시간이 그냥 훌쩍 지나가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지금 기대할 수 있는 건 아산병원의 임상실험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임상실험병동에서 전화가 왔다. 안 된다고 해도 좌절하지 말자, 낙담하지 말자 수십 번 다짐을 했건만 수화기 너머 들리는 목소리는 또다시 우리 가족을 무너뜨렸다.  

"죄송합니다. 환자분 피검사 결과 임상실험에 맞지 않는 걸로 나왔어요"


결국, 아빠는 마지막 4차 항암제인 알약 항암제, TS-1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 뭐 이러냐, 너무해도 참 너무한다 싶지만 그래도 아빠가 살아 계시는 이 상황에 감사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이 상황에서 가장 힘든 사람은 당연지사 아빠였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몇 번이나 품었지만 역시나 늘 안 좋은 결과가 나왔고 이번에는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간절히 바랐는데 또다시 잘 되지 않았다. 아빠는 벼랑 끝에 서있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벼랑에서 뛰어내리고픈 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빠는 정말 대단하게도 그렇게 고통스럽고 절망 같은 상황 속에서도 '항암을 하겠다'는 의지를 내보였다. 


설상가상으로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복통 때문에 신경차단술을 했지만 이미 통증이 심각한 상황이었기에 신경차단술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2022년 4월 경, 아빠는 배가 너무 아파서 눕지를 못했다. 얼마나 아팠냐면 하루종일 장이 꼬인 것처럼 아프고 지속적인 복통으로 허리를 필 수가 없어서 앉아서 생활했고 식사도 하루에 한 끼를 겨우 먹고 그마저도 설사를 하거나 토해냈다. 거의 3~4주 동안 안방 문을 닫고 하루에 3시간, 4시간씩 앉아서 겨우 잠을 자고 고통으로 뒤덮인 날들을 보냈다. 나는 당시 매일매일 아빠에게 전화를 했는데 아빠는 그때 나에게 '말할 힘이 없으니 전화하지 마라'며 통화를 거부했다. 엄마는 고통과 싸우는 아빠를 보며 어떻게든 먹자, 움직여보자고 했지만 아빠는 도저히 못하겠으니 제발 가만히 내버려 두라고 엄마에게 화를 냈다. 의지에 활활 타오르며 '암과 싸워보자!!' 했던 그 모습이 마치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5월 10일, 아산병원에서 TS-1 항암제를 타러 가는 날. 아빠가 참다못해 '교수님 배가 너무 아픕니다'라고 말을 했다.  교수님은 평소 아프다고 말 안 하는 환자가 아프다고 하자 이건 큰 일이다 생각했는지 증상을 묻고는 조심스레 장폐색을 의심했다. 그러면서 아산병원에 입원해서 정밀검사를 하자고 했다. 하지만 아산병원의 암병동이 꽉 차있어서 지금 당장 입원이 불가능하고 2주 뒤에 입원이 가능하다고 했다. 2주 동안 주변에 있는 요양병원에서 대기를 하라는 거다. 


고통만 계속되던 답보상태에서 그래도 뭔가가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요양병원으로 옮긴 아빠는 영양제를 맞기 시작했고 음식물 섭취 대신에 영양제를 맞기 시작하자 아빠는 복통이 눈에 띄게 줄었다며 이제 누울 수도 있다며 좋아하셨다. 내가 병문안을 갈 때마다 아빠는 본인 앞에서 먹방을 보여달라며 같이 식당에 가서 내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배가 고픈데 뭔가를 먹으면 또 배가 아플까 봐 제대로 식사도 하지 못했다. 어쩌다 괜찮은 것 같아서 미음을 먹으면 여지없이 배가 아파왔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이제 일주일만 더 있으면 아산병원에 입원해서 정밀검사를 받고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일주일을 앞두고 아빠에게 지옥 같은 시간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딸이 배부르게 먹는 모습을 보고 싶다며, 아빠는 링거줄을 달고 맞은편에 앉았다



어버이날. 요양병원에 입원 중인 아빠에게 '평생 잘해드릴 테니 오래오래 사시라고' 편지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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