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대장 아빠의 암투병기
2020년 11월 1차 항암제 폴피리녹스를 시작으로 총 20회 차의 항암을 했다. 구역감과 손발 저림 등등 셀 수 없는 고통을 이겨내며 항암주사를 맞고 또 맞고 버티고 또 버텨냈던 아빠. 우리는 분명 하늘이 아빠의 노력에 감동해서라도 좋은 결과를 안겨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2021년 8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는 게 있다는 현실을 알게 되었다. 폴피리녹스 항암제에 내성이 생긴 것이다. 20회 차 항암을 끝내고 CT검사를 했는데 간에 전이된 암이 오히려 더 커진 것이다. 간에 전이된 암 때문에 수술을 못해서 한바탕 난리를 겼었는데 오히려 암이 커졌다니... 그간 항암제와 싸워오던 아빠에겐 벼락같은 소식이었다. 교수님 역시 아빠의 의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따뜻한 목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1차 항암제에서는 내성이 생겼지만 2차 항암제에서 좋은 효과를 기대해 볼 수 있다며 일주일에 한 번씩 맞아야 하는 힘든 스케줄이지만 힘을 내서 다시 해보자고 했다.
2차 항암은 젬시타빈과 아브락산 항암제를 맞는 일명 젬아라고 불리는 항암이었다. 젬아역시 많은 췌장암 환자들이 맞는 항암제로 젬아를 맞고 나서 암 크기가 줄어들거나 호전된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가 아빠에겐 전혀 들리지 않았다. 아빠는 '암이 커졌다', '항암제에 내성이 생겼다'라는 말에 잠식되었고 아빠의 상심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그 어떤 위로도, 응원도 아빠에겐 들리지 않았다.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 아빠가 말했다.
"사실, 나는 항암제만 이겨내면 된다고 생각했거든. 암은 항암제가 이기는 거니까 나는 항암제만 이기고 견뎌내면 된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아침마다 운동도 하고 밥도 잘 먹고 아파도 잘 견뎠는데... 나는 분명히 항암제를 이겼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암이 항암제를 이길 줄은 몰랐네. 암이 항암제를 이겨버렸네"
그랬다. 암이 항암제를 이겨버린 것이다. 암은 아빠의 의지도 이겼고 아빠의 희망도 앗아가 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1차 항암제에선 내성이 생겼지만 2차, 3차 항암제가 있기 때문에 아직 포기하기엔 일렀다. 아빠는 집에 내려간 일주일 사이, 참 많은 감정을 느꼈다고 했다. 분노와 포기, 좌절을 거치고 끝내는 수긍의 단계에 이르렀단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뭐라도 해야지. 내가 항암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행운이냐' 하면서 마음을 다잡았다고 했다. 젬아 항암주사는 폴피리녹스보다는 약이 덜 세고 항암 부작용이 덜한 대신, 머리가 빠지는 부작용이 있다고 했다. 아빠는 젊은 시절 스트레스로 부분 탈모가 되었기 때문에 머리 빠지는 게 무슨 대수냐며, 이미 다 빠져있다며 실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생각보다 항암 부작용이 심각했던 것. 심적으로 힘들어서 그런지, 아빠는 1차 항암보다 2차 항암을 훨씬 더 힘들어했다. 그리고 젬아 항암을 맞고 2주 차정도 됐을까, 머리카락이 숭덩숭덩 빠지기 시작했다. 머리카락뿐만 아니라 눈썹도 모조리 빠져서 아빠는 자신감마저 잃었다.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볼품이 없어 보인다며, 내가 왜 이렇게까지 치료를 받아야 하냐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우울해했고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처음 항암을 시작할 때 씩씩했던 아빠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렇지만 젬아 항암제가 암 크기를 줄이고 간에 전이된 암들을 없애주기만 한다면 이 모든 게 무슨 대수일까. 일주일에 한 번씩 서울에 올라와서 항암주사를 맞고 4주에 한 번씩 CT를 찍는 고된 스케줄을 묵묵히 참고 견뎠던 이유는 하루라도 더 살기 위해서, 한 달이라도 더 살기 위해서였다. 아빠가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 있었다. 췌장암은 2년만 버티면 된다고. 2년만 버티면 3년을 살고 3년을 버티면 5년을 산다고. 5년을 버티면 평생 살 수 있다며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러나 하늘은 무정하게도 아빠의 노력을 철저히 외면했다. 젬아 항암치료를 받은 지 5개월째. 32회 차만에 또다시 내성이 생겼다. 췌장에 생긴 원발암의 크기가 조금은 줄었지만 간에 다른 암덩어리가 생겼다고 했다. 그러니 젬아는 그만 맞고 3차 항암제인 오니바이드를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수님은 젬아에서도 효과가 있긴 있었으니 분명 오니바이드도 잘 맞을 거라며 아빠를 응원했다. 하지만 이 긴긴 시간들을 버텨오면서 아빠는 병원과 교수님에 대한 불만이 생겼다. 하라는 대로 열심히 치료를 받고 있는데 왜 자꾸 내성이 생기고 암이 커지냐며 의사가 돌팔이 아니냐며, 대한민국 최고의 암 병원이라더니 순 거짓말이라며. 그러다가 또다시 어떤 날은 교수님 덕분에 이렇게 살아있다며 감사하다고 하기도 했다. 아빠의 기분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하루에도 몇 번을 널뛰었다. 그런 아빠의 옆에서 더 이상 '힘내세요'라는 말은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빠의 말을 그저 가만히 귀 기울여 듣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3차 항암제 오바이드를 맞는 시기와 맞물려 아빠의 복통은 나날이 심해지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생겨난 통증인데 복부와 등 쪽에 배가 꾹꾹 눌려서 장이 꼬이는 것처럼 배가 아프다고 했다. 교수님은 췌장에 암덩어리가 커져서 신경을 누르기 때문에 아픈 것 같다며, 신경에 마취제를 넣어서 통증을 잠재우는 신경차단술을 권했다. 하지만 아빠는 몸에 조그마한 상처라도 나면 면역이 떨어져서 암치료가 안 될까 봐 무척 예민해했기 때문에 몸에 구멍을 뚫고 시술을 한다는 건 절대 반대했다. 아프다고 이것 치료하고, 저것 치료하고, 약 먹고 그러다 보면 의지가 꺾이게 되고 약에 의존하게 된다며 아직 의지가 있으니까 고통을 참아내 보겠다고 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2022년 새해가 밝았다. 우리 가족은 아빠가 매일 오르던 동네 뒷산인 시루봉을 오르며 새해에 간절히 빌었다. '우리 아빠 낫게 해 주세요, 낫는 게 너무 큰 소원이면 우리 아빠 70세까지는 건강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라고 말이다. 하지만 정말 기적이란 건 없나 보다. 아빠는 3차 오니바이드에서도 내성이 생겨버렸다. 겨우 4회 차만 했을 뿐인데 아빠의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그런 걸까, 아빠의 몸은 더 이상 항암제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더 이상 췌장암 환자에게 쓸 수 있는 항암제가 남아있지 않았다. 마지막은 TS-1이라는 알약인데 이 약은 항암치료보다는 생명 연장의 수단으로 먹는 약이라고, 교수님이 큰 기대는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면서 병원에서 임상시험을 하는 게 있는데 피검사를 해서 데이터가 일치하면 임상시험이라도 해보자고 했다. 절망의 벼랑 끝에 선 순간이었지만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는 교수님이 참으로 감사했다.
아빠의 몸 상태는 말로 다할 수 없었다. 그동안 쌓인 항암주사의 독성 때문에 구역감과 손발 저림은 일상이 되었고 변비가 심각했고 무엇보다 아빠를 괴롭히는 복통이 이제는 일상생활을 할 수 없는 지경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희망은 있었다. 교수님이 제의했던 임상시험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것이다. 우리 가족은 이제 기대라는 걸 하지 않기로 했다. 희망도 감히 품지 않기로 했다. 만약 임상시험에 선정되어서 새로운 항암제를 받게 된다면 정말 기쁜 일이지만 탈락하게 되어도 낙담하지 않기로 했다. 그간 너무나 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어와서 그런지 우리 가족은 어느 때보다 단단했고 흔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임상시험의 결과만을 손꼽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