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대장 아빠의 암투병기
아빠는 요양병원에서 아산병원 암병동 입원실에 자리가 날 때까지 2주를 기다렸다. 일주일쯤 지났을 때인가? 아빠의 다리가 점점 붓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코끼리 다리처럼 퉁퉁 붓고 종아리가 점점 풍선처럼 부어오르더니 수액 같은 액체가 피부를 뚫고 흘러나왔다. 몸에 수액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그런 것 같아서 간호사에게 이뇨제를 놓아달라고 했지만 이미 시작된 부종을 멈출 수 없었다. 암투병은 처음이고 영양제 수액을 이처럼 길게 맞아 본 것도 처음이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고통은 아빠를 잠식했고 이내 아빠의 마음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아빠와 엄마는 60대가 넘은 나이에도 서로를 이름으로 부르며 손을 꼭 잡고 다니는 잉꼬부부였다. 주말마다 함께 여행을 다니고 엄마에게 '각시~'라고 부르며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도 했다. 그렇게 엄마한테 화도 잘 안 내고 짜증도 안 내던 아빠가 점점 큰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엄마는 아빠가 췌장암 투병을 시작하고서부터 한시도 곁에서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 그 노력과 정성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아빠는 마음속에서 울컥울컥 올라오는 화와 짜증을 주체하지 못했던 것이다. 온화하고 배려심 넘치고 늘 웃음 짓던 아빠의 선한 얼굴이 고통으로 잠식되어 버렸다. 사실 그때 당장에라도 아산병원 응급실에 달려갔어야 했지만 때마침 입원 날짜가 이틀 뒤라서 이곳에서 버티고 아산병원에만 가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다.
드디어 아산병원에 입원하는 날. 아빠의 다리는 말도 못 하게 부어서 엑스라지 사이즈의 트레이닝 바지가 꽉 낄 정도였다. 아빠는 퉁퉁 부은 다리로 걷지를 못해서 휠체어에 탈 수밖에 없었다. 아빠를 모시러 나와 남편이 차를 끌고 왔는데, 아빠는 우리를 보자마자 갑자기 눈물을 보이셨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요양병원 앞을 산책하기도 하고 식당에서 밥 먹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하고 빵집에서 빵을 한가득 사주던 아빠는, 수액으로 퉁퉁 부은 다리를 주체하지 못해 눈물을 터뜨렸다. 이 상황이 속상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고... 아빠는 당시 복잡한 심경이었을 거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예감하기 시작했다. 우리 아빠에게 절대 오지 않을 것만 같던 '죽음'이 서서히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아산병원에서 상태가 호전되면 다시 ts-1 항암약을 먹고 항암을 계속해서 이어나가겠다고 했다. 어떻게든 암에게 지지 않겠다며, 아빠는 해낼 수 있다며 가족 앞에서 굳게 다짐하셨다.
아산병원에 아빠가 입원하고 곧바로 김규표 교수님이 내원해 진료를 봤다. 교수님과 간호사들은 다들 깜짝 놀라면서 이렇게까지 부종이 심한 환자는 처음 봤다며 급하게 이뇨제 처방을 했다. 정밀검사 결과, 아빠는 부종이 아니라 배에 복수가 차고 있었고 췌장과 간에만 있던 암은 장과 위를 포함해 이미 복부 전신에 다 퍼져 더 이상 손쓸 수가 없는 상태였다. 결국, 복수에 배액관을 달아 복수를 빼냈고 암치료는 더 이상 방법이 없었기에 아산병원은 아빠에게 호스피스를 권했다. 처음에 아빠는 호스피스는 사람이 죽으러 가는 곳이 아니냐며, 나는 아직 싸울 수 있다며 안 가겠다고 우겼지만 나는 아빠를 계속해서 설득했다. '호스피스에 가면 진통제도 마음껏 놔주고 마음도 편해져서 오히려 몸이 건강해지는 사람들도 많아요. 죽으러 왔는데 오히려 살아서 퇴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아빠, 호스피스는 살기 위해 가는 곳이에요. 죽으러 가는 곳이 아니에요'라고 말이다.
하지만 호스피스 선고보다 더 가슴 아픈 건 뼈만 남은 아빠의 모습이었다. 5월 29일. 아산병원에 입원한 아빠를 보러 갔다. 식사를 못하고 영양제에만 의존하며 모르핀에 진통제에 소변줄에 복수 배액관까지. 각종 수액을 주렁주렁 달고 휠체어를 타고 나타난 우리 아빠. 쥐어짜듯 힘겨운 목소리로 엄마를 부탁한다고, 고통 없는 곳에서 편하게 죽고 싶다고. 그렇게 유언 같은 말을 내뱉은 우리 아빠. 나는 아빠 손을 꼭 붙잡고 꼭 그리하겠노라. 아빠 딸만 믿으라고. 약속을 했다. 하지만 참 죽는 것도 쉽지 않다는 말이 정말 딱인 게 호스피스도 한두 달 전에 예약을 해야 자리가 있지, 지금 당장 알아본다 한들 자리가 있는 곳이 없었다. 아산병원 암병동은 일주일만 입원이 가능했기에 그 사이에 다른 호스피스로 가야 하는데 전화하는 곳 족족 기본 한 달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서울에 있는 모든 대학병원 호스피스와 호스피스의원에 전화를 다 돌렸지만 지금 당장 옮길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불안함에 발만 동동 구르다 결국 경기도까지 호스피스를 몇 군데 알아봤다. 나는 당시 직장동료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하루종일 전화통을 붙들고 호스피스를 알아봤고 몇몇 곳은 보호자가 와서 상담을 해야 예약을 잡을 수가 있다고 해서 동분서주 뛰어다니며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그리고 아산병원이 최후통첩을 날렸다. 하루에 20~30만 원 금액을 더 내고 병실을 업그레이드해서 며칠 더 있든지 아니면 당장 나가라고 말이다. 이번엔 또 아빠를 받아주는 요양병원을 찾아야 했다. 호스피스 판정을 받은 환자는 진통제가 많이 필요한데 요양병원은 진통제 처방을 많이 못해주기 때문에 호스피스 판정을 받은 환자를 꺼린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 곳은 우리 아빠를 받아주겠지 하는 생각으로 또 미친 듯이 전화를 돌렸다.
그리고 정말 감사하게도 근처 요양병원에서 아빠를 받아줄 수 있다고 연락이 왔다. 일단 한시름은 놨지만 정작 가야 하는 호스피스는 자리가 도무지 나질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도 아빠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괴로워하며 병원 바닥에 누워 비명을 지르고 너무 아프니까 그냥 빨리 끝내달라고 엄마에게 애원을 하기도 하고 고통을 참으려고 이를 꽉 깨물다 어금니가 부서지기도 했다. 아빠는 차마 글로 다할 수 조차 없는 정도의 고통을 혼자 견뎌내고 있었다. 나는 아빠에게 '괜찮아요, 호스피스로 가면 진통제를 더 놔주니까 덜 아플 거예요. 조금만... 조금만 기다리세요. 괜찮아질거예요' 라며 위로했지만 이제 우리 가족은 괜찮다고 하는 말이 전혀 괜찮지 않음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우리 가족에게 '괜찮다'는 말은 스스로 위안 삼기 위한 자기최면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6월 1일 오전 9시 30분. 경기도 용인에 한 호스피스에서 지금 자리가 났으니 당장 오라고 연락이 왔다. 연락을 받고 남편이 나 대신 요양병원으로 향했다. 사설 구급차를 불러 아빠와 엄마를 모시고 호스피스로 향했다. 구급차를 탈 때까지만 해도 아빠는 사위의 얼굴도 알아보고 의사소통이 가능했다고 한다. 하지만 가는 도중부터 컨디션이 급격하게 나빠졌고 도착해서는 정신을 거의 놓으셨다. 아빠가 도착하자마자 의사와 간호사가 상태를 보더니 '임종 면회를 준비하셔야겠네요'라고 했다. 환자가 어떻게 이 지경까지 버텼냐며, 지금 바로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몸 상태가 최악이라고 했다.
나는 회사에 반차를 쓰고 당장 경기도 용인으로 달려갔다. 용인의 호스피스에 도착하자마자 왈칵 눈물이 났다. 그곳은 아빠가 좋아하는 산 속에 위치한 곳이었다. 아빠가 좋아하는 나무도 많고 아빠가 좋아하는 흙내음이 가득 풍겼다. 이곳에 조금만 더 빨리 왔더라면 산대장 아빠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산의 기운을 마음껏 느껴볼 수 있었을 텐데.. 너무 죄송스럽고 한이 맺혀 눈물이 자꾸만 흘렀다. 낭창하게 메아리치는 새소리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렇게 밖에서 1시간을 기다렸을까, 임종 면회가 준비됐다고 우리를 불렀다. 나와 남편 그리고 오빠가 함께 아빠의 마지막 모습을 보러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