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대장 아빠의 암투병기
아빠가 췌장암 4기 간전이 환자가 되고 나서 처음 투여한 항암제는 폴피리녹스이다. 아빠는 췌장암 환자 중에서도 비교적 젊고 (64세) 평소 운동도 열심히 해서 체력이 좋았기에 아산병원 종양내과 김규표 교수님은 폴피리녹스 1차 항암제로 아빠가 꼭 좋아질 거라고 하셨다. 물론, 교수님이 신은 아니었지만 그때 우리 가족에게는 신과 다름없었으니 그 말이 아빠에게 엄청난 용기를 불어넣어 줬다.
폴피리녹스는 2주에 한 번씩 투약하는데 4시간 동안 항암주사를 맞고 일명 가방항암이라고 불리는 5fu(플루오라실)을 48시간 동안 맞는다. 가방항암이란, 휴대용 통에 항암제를 넣고 링거처럼 달고 다니면서 48시간 동안 주사를 맞는다. 그리고 약을 다 맞으면 근처 병원에 가서 항암주사를 빼면 된다. 처음 폴피리녹스를 맞았을 때 아빠는 '이거 별거 아니네!' 하면서 자신 있어했다. 항암주사라는 단어에서 오는 공포감이 컸는데 막상 해보니 속이 메슥거리는 것 말고는 별 문제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항암이 1차, 2차, 3차가 될수록 아빠가 힘들어하는 것이 눈에 띄게 보였다. 평소 가족에겐 절대 약한 모습을 안 보여주는 아빠가 처음으로 '힘들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고 이게 그것은 아빠의 일상이 되고 말았다.
항암주사를 맞고 나서 아빠를 가장 크게 괴롭히는 증상은 울렁거림, 입 마름 그리고 변비였다. 가만히 있으면 더 힘드니까 아빠는 더 악착같이 산을 올랐고 운동을 했고 고통을 잊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했다. 항암제를 4번을 맞으면 CT를 촬영해서 경과를 시켜보는데 이 과정을 한 사이클이라고 한다. 비록 췌장암 4기에 간전이까지 됐지만 워낙 아빠의 체력이 쌩쌩하고 식사도 정말 잘하셨기에 폴피리녹스 항암주사가 분명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첫 검사 결과를 듣는 날, 우리 가족은 모두 엉엉 울어버렸다.
첫 CT검사 결과, 췌장암 꼬리에 있는 암 크기가 줄었고 간에 전이된 것들도 조금씩 옅여져있었다. 원발암 크기가 4분의 1 정도로 줄은 것이다(CT를 보면 크기가 줄어든 것이 확연히 보였다) 교수님은 크게 기뻐하며 상기된 목소리로 "암 크기가 줄었습니다. 앞으로도 이대로 쭉 치료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라고 하셨다. 그 목소리가 마치 천사의 목소리 같았다. 마스크너머로 웃음 짓는 교수님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듯했다. 아빠는 얼떨떨한 모양이었다. 그동안 항암제라고 해서 무슨 주사를 맞고 있긴 한데 이게 정말 효과가 있는 건가? 싶으셨단다. 근데 진짜로 이 항암제 덕분에 암 크기가 줄었고 전이된 암도 옅어지고 있다고 하니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단다. 그렇게 교수님은 앞으로 3사이클, 그러니까 12차 항암까지 지켜보고 앞으로의 치료 방향을 결정하자고 했다.
그리고 두 번째 CT검사 날, 지난번 CT검사 때 암이 줄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빠는 더 열심히 힘을 내서 밥을 먹고 운동을 하고 컨디션을 관리했다. 하지만 이번 검사결과에서 암 크기가 더 이상 줄진 않았다. 그래도 암이 더 커지지 않았으니 이게 얼마나 다행인가, 그걸로 위로를 삼으려는 찰나. 교수님이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환자분은 체력도 좋고 피검사에서도 별 문제가 없으니 항암을 4번 더 해보고 PET CT검사와 MRI검사를 해서 다른 곳에 전이된 게 없으면 수술을 해보시는 게 어떨까요? 원발암 부분인 췌장꼬리와 간에 전이된 부분을 제거하는 수술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췌장암 4기 환자에게 수술이란 정말 뜻밖의 이야기다. 암이 전이가 된 상태인데도 수술을 하자고 할 정도면, 꽤나 성공률이 높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우리 가족은 늘 '기적'이라는 단어를 꿈꿨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암에 걸려도 수술도 하고 완치도 하고 잘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래서 우리는 그런 기적 같은 일이 꼭 올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수술이 가능하다'라는 말을 듣고 그 기적을 몸소 경험하게 되었다. 아빠는 나에게 "나는 치료하면서도 내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진짜 살 수 있을 것 같다. 딸아, 아빠 살 수 있다! 그렇지? 수술할 수도 있다고 하니까 항암을 열심히 해야겠다! 우리 가족도, 치료해 주는 교수님도 다 실망시키지 말아야지! 아빠만 믿어라, 우리 힘내자!"라고 하셨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췌장암은 그리 호락호락한 놈이 아니었다. 마치 우리가 꿈꿨던 기적은 드라마나 영화에만 있으니 헛된 꿈을 꾸지 말라고 비웃는 것처럼 췌장암은 아빠의 숨통을 점점 조여만 갔다. 폴피리녹스 항암 12차가 끝나고 수술 여부를 결정짓는 PET CT와 MRI 결과가 나왔다. 결론은 '수술이 불가능하다'였다. 사실 수술을 하기 위해선 간에 전이된 암을 최대한 없애야 하는데 다발성 간전이라서 생각보다 수도 많고 깔끔하게 다 없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상심해 있던 아빠에게 교수님은 뜻밖의 제의를 했다. "아버님 혹시 표적항암제라고 아시나요? NGS유전자 검사를 해서 아버님한테 브라카라는 변이 유전자가 있으면 거기에 맞는 약을 쓰는 건데 이걸 한 번 해보죠"라고 말이다. 사실 나도 이 검사를 알고 있었으나 의사가 먼저 환자에게 권하는 경우가 잘 없고 환자가 부탁해서 검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하지만 교수님은 우리 아빠를 위해 방법을 제시해 주셨고 우리는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했다. 만약 NGS유전자 검사에서 아빠가 췌장암 원인이 브라카 변이 유전자 때문이라고 나온다면 그 유전자를 표적으로 치료하는 린파자 약을 먹으면 되기 때문에 아빠에게 훨씬 더 좋은 방법이긴 했다. 그렇게 46만 원에 달하는 검사비용을 지불하고 2주를 기다렸다.
2주 후, 유전자 검사 결과가 나왔다. 아빠에게는 브라카 변이 유전자가 없어서 표적 치료제를 사용할 수 없다고 했다. 그 말은 다시 또 항암주사를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빠는 혹시나 모를 희망을 품었다가 다시 땅으로 푹 꺼진 듯했다. 수술이라는 희망에서 다시 땅으로 꺼지고, 유전자 검사라는 희망에서 다시 땅으로 꺼졌다. 그렇게 계절은 5월 중순이 되었고 11월에 항암을 시작했던 아빠는 겨울을 지나 봄, 그리고 여름을 앞두고 있었다. 아빠는 다시 힘을 내서 폴피리녹스로 어떻게든 암크기를 줄여보려고 했다. 하지만 아빠의 의지와 기대는 8월, 무더운 여름이 되면서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