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글을 쓰는 저를 보며 남편이 무슨 글을 쓰냐고 묻기에 직업 선택 기준에 대해 쓰고 있어라고 답을 했더니 나도 읽어봐야겠다라며 "아, 스트레스받아"라는 말을 남기고 침실로 들어가더군요. 저희 남편은 신입으로 화학 회사에 연구직으로 입사했고 연구직이 답답하게 느껴져 몇 년 후 기술 영업으로 직무를 변경했습니다. 하지만 계속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것을 보면 어쩌면 산업과 남편과의 궁합이 맞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희 남편은 나름대로의 패셔니스타입니다. 옷과 신발에 관심이 많고 제가 보기에 상품을 고르는 안목도 훌륭합니다. 알고 보니 고등학교 때 그림을 잘 그려 선생님으로부터 미술을 전공하라는 제안을 받기도 했다는군요. 남편의 쇼핑은 저희 집의 거의 유일한 분쟁의 소지가 되고는 하는데 오늘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남편이 화학이 아닌 패션 산업을 택했더라면?' 화학 전공이라 패션 전문 회사로의 입사가 힘들었더라면 패션 및 섬유 산업을 영위하고 있는 화학 회사를 선택해 일을 했다면 지금보다는 좀 더 만족하며 회사를 다니고 있지는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 남편이 화학 회사가 아니라 패션 회사에 갔더라면 조금은 더 즐거운 회사 생활을 하고 있지 않을까요? 사진: Bill Oxford
나에게 무슨 일과 어떤 산업이 맞는지를 알려면 평소 자기 자신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나는 무엇을 할 때 제일 신나고 내 취미는 무엇이고, 사람들이 내가 무엇을 잘한다고 이야기하는지, 나는 사람들과 어울려 일 하는 게 좋은지 혼자 일 하는 게 좋은지, 안정성과 변동성 중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등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가령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에 싫증을 내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매일매일의 업무가 크게 바뀌지 않는 은행보다는 프로젝트 단위로 항상새로운 과제를 해결해야하는 컨설팅 회사가 더 잘 맞는 궁합이 되겠죠.
그럼 이즈음에서 제가 3년간 몸 담았던 저의 첫 회사 S해운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S해운은 당시 해성처럼 등장한 STX 그룹 소속의 STX 팬오션입니다. 지속적인 M&A로 외형을 키워온 STX그룹은 범양상선을 인수해 STX 팬오션으로 사명을 변경했습니다. 하지만 조선과 해운 그리고 중공업 사업분야에 집중했던 STX그룹은 2008년 불어닥친 글로벌 금융위기로 조선 및 해운 시장이 침체됨과 함께 무리한 M&A가 화근이 되어 결국 그룹이 해체되었고 STX 팬오션은 하림에 매각되어 현재는 하림 팬오션이 되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저는 STX 팬오션의 해외영업에 지원했었지만 제 희망과는 달리 기획실로 배치됩니다. 기획실로의 배치는 저의 커리어 인생에 참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차차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해외 영업에 배치되지 않은 것은 해외 영업이 밤샘 야근이 잦아 여자 직원한테는 힘들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회사 내에는 해외영업 외에 배의 운항을 지원하기 위한 운항본부, 경영지원본부와 전략기획본부 등이 있었는데 전략기획본부 내의 기획실 소속 S&P(Sales & Purchase) 팀이 바로 24살의 패기 넘치던 제가 배치된 곳이었습니다.
S&P팀은 해운회사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조직으로 배를 사고파는 일을 합니다. 증권회사에서 주식을 사고팔면서 시세차익을 얻는 것처럼 해운회사에서도 저점에 배를 사고 고점에 팔면 시세차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거액의 자산이라는 점에서 주식 투자보다는 부동산 투자와 비교하는 게 이해에 더 도움이 되실 것 같네요.
여기까지만 들으면 선박이라는 거액의 자산을 들었다 놨다 하는 S&P팀이라는 곳이 소위 말하는 '간지 나고''다이내믹' 한 곳이라는생각이 들 수도 있으실 텐데 실상은 이와는 좀 달랐습니다. 우선 선박의 매매 건수가 1년에 두 세건 밖에 되지 않아 '다이내믹함'을 느끼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 회사는 그룹 차원에서 공격적으로 신입사원을 채용 중이던 때라 해야 할 일보다 사람이 더 많은 수급 불균형 상황으로 회사 생활의 무료함이 저를 끝없는 고민의 나락에 빠지게 했습니다.
누군가는 일이 없는 게 힘들었다니 팔자 좋은 소리 한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부푼 꿈과 도전 정신에 가득 차 있던 저는 '누군가는 다른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며 역량을 키우고 있을 텐데'라는 생각을 하면 인터넷 서핑을 하며 시간을 흘려보내는 제 자신이 뒤쳐지고 있는 것만 같아 괴로웠습니다.
혹시 돈은 많이 주지만 일은 별로 없는 이런 직장을 꿈꾸고 계신 분들도 있으실지 몰라 산업의 특징과 연관 지어 한량을 꿈꾸는 분들을 위한 팁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들어 저는 투자 광풍에 휩쓸려 투자와 관련된 유튜브 강의도 많이 듣고 관련 책도 몇 권 읽어보았습니다. 이들이 강조하는 바는 바로 '내가 아닌 내 자산이 일 하게 하라'였습니다.
해운회사는 바로 선박이라는 자산이 이 항구 저 항구 돌아다니며 일을 합니다. 물론 선박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선박의 선원들도 필요하고 급유나 입항 등의 운항 업무를 할 본사 직원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투입되는 인건비를 다 지불하고도 남을 큰돈을 바로 선박이 벌어다 줍니다. 요즘 대한항공이 승객 대신 화물을 운송하며 돈을 버는 것처럼 말이죠. 이렇게 큰 자본을 들여 보유한 유형의 자산을 통해 수입을 창출하는 산업을 바로 '장치 산업'이라고 하는데 장치가 돈을 벌어다 주니 다른 산업보다 인력을 여유 있게 고용해도 여전히 흑자 구조고 인력이 많으니 당연히 1인당 해야 할 일은 줄게 되는 거죠.
두산백과에서는 장치산업의 종류로 석유정제업, 석유화학, 화학공업, 철강업, 자동차, 조선 등의 산업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각 산업별로 대표회사들을 떠올려보시면 대부분 급여가 높은 회사들입니다. 직무별로 차이는 있겠지만 소비재 산업이나 컨설팅업 등 별다른 자산 없이 인력만이 자산인 회사보다는 평균적으로 일이 적을 확률도 매우 높습니다.
그럼 다시 제 얘기로 돌아가 볼게요. 제가 3년이라는 시간을 단지 무료함에 허우적거리며 보냈을까요? 대답은 '그렇지 않다'입니다. 제 회사 생활은 원하지 않았던 또 한 번의 팀 이동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으니... 다음 편에서 저의 회사 생활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재미없는 회사 생활 속에서 어떤 우연이 찾아왔는지 말씀드릴게요. (3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