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낭 주절대고 싶은 날
아이와 보드게임을 했다. '우봉고'라는 이름의 보드게임으로, 종이 블럭 조각을 가지고 각자 배부된 판 모양에 따라 블럭을 맞추는 게임이다. 모래시계가 있어서, 모래가 다 떨어질 때까지 맞추면 보석 하나를 가져갈 수 있는데 모래가 다 떨어지고 맞추면 보석을 가지고 갈 수가 없다. 보석은 검은 주머니에 들어 있는데 각각 색깔이 있어서 색에 따라 점수가 다르다. 보석은 주머니 안쪽을 보지 않고 고르게 되어 있다. 즉, 자신이 무슨 색 보석을 골랐는지는 고르고 나서야 볼 수 있다. 몇 개 못 맞춰도 보석을 잘만 고르면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다.
저번에 아이와 했을 때 실력이 비등비등 했으므로 이번에도 나는 특별히 봐주지 않고 게임을 했다. 첫째 판에서, 의외로 내가 일찍 블럭을 맞추었다. 아이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나는 먼저 보석을 얻었고 아이는 시간 안에 블럭을 맞추지 못해서 보석을 가져가지 못했다. 여기서부터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 다음 게임에서는 아이와 내가 모두 블럭을 시간 안에 맞추어서 보석을 가지고 갔으나 아이는 1점까리 보석을, 나는 3점짜리 보석을 가지고 가서 내가 계속 앞서가는 상황이었다.
솔직히 아이와 게임을 했을 때는 너무 큰 점수차로 이겨도 걱정이다. 저번과는 달리 초반부터 점수차가 많이 나는 상황이 되자 아이의 얼굴빛은 점차 안 좋아졌고 나는 마음 속으로 조마조마했다. 아무래도 조금 봐주면서 해야 겠다고 생각했을 때, 내가 또 너무 빨리 블럭을 맞추고 말았다. 아이는 "너무 빨리 맞추는 것은 반칙이야!"라고 소리치면서 울먹거렸다. 그 순간, 나는 아이를 봐주고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나 봐줄 땐 봐주더라도 규칙은 지키게 하고 싶었다. 그래야 다른 아이들하고도 즐겁게 게임을 할 수 있을 테니까. 너무 봐주고 져주기만 하면 친구들과 놀이를 할 때도 이기려고만 들 것 같았다. "빨리 맞추는 게 반칙은 아니야." 설상가상으로 아이는 시간 안에 블럭을 맞추지 못했다. 아이는 잘 못 맞춘 블럭을 가지고 잘 맞추었다고 우겼다. 찡얼거리는 소리가 높아졌다. "계속 이러면 나는 게임을 할 수 없어." 나는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만 더 견디면 내가 져줄 텐데, 아이는 그것을 모르고 울먹거렸다.
마침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고 온 남편이 나와 아이를 보더니 괜히 신이 난 듯이 어깨를 들썩거리다가, 남편과 아이가 놀이를 하는 바둑판을 꺼냈다. 그리고 나와 아이가 놀고 있는 옆에서 바둑판에 바둑돌들을 쏟아놓고 있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물었다. "뭐해?" "아이가 끝나면 이거 하고 놀려고." 남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이가 말했다. "나 저거 할래."
나는 아이와 나와의 놀이를 이렇게 끝내고 싶지 않았다. 결국 버티면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내가 져주면서 알려주려고 했었다. 그러나 한 번 남편에게로 향한 관심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내가 당황한 찰나, 남편이 더 당황스러운 이야기를 했다. "그거 다 끝내고 엄마한테 사과하고 와." 나한테 뭘 사과해야 하는지, 그리고 끝내는 건 또 뭔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 남편을 보고 나는 황당함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나에게 아이가 말했다. "엄마 미안해. 나 아빠랑 저거 하고 싶어." "저건 아직 준비된 게 아니야. 엄마랑 놀이 끝내고 가야지." 그래도 한 번은 이기고 가야 하지 않겠니. 속의 말은 하지 않았다. 아이는 이미 나와의 놀이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지금 같았으면 "그래, 대신에 보석 다섯 개 걸고 한 판 하자. 여기서 이기는 사람이 다 이기는 거야." 라고 하고 아이가 한 번은 이기게 하고 끝냈겠지만 당시에는 그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아빠가 사과하고 오라고 했잖아." 아이는 사과했으니 됐다는 마음인 모양이었다. 오은영 박사님이 만약 이 장면을 보신다면 멈추라고 하고 한 마디 했을 것이다. 아이가 사과를 할 상황도 아니었고, 오히려 사과를 잘못 배울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안 그래도 미안하다 한 마디면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양 구는 아이인데.
나는 더 버틸 기운도 없었다. "그래, 가. 대신에 다 정리하고 가." 아이는 제가 놀던 것을 꼼꼼하게 정리했고 나도 같이 정리했다. 보드게임을 넣어 놓고 나서 아이는 아빠와 놀이를 시작했다. 나와 하던 것은 다르게 아주 신이 났다. 남편은 아이와 함께 놀이를 하면서 계속 나에게 말을 걸었다. "눈높이 수학 필요 없지, 이런 게 수학이야." 아닌 게 아니라, 남편은 아이에게 계속 바둑돌을 세어보게 하면서 자기 딴에는 꽤나 지혜롭게 수학 공부를 시키고 있었다. "응? 눈높이 수학 필요 없지." 내 반응이 심드렁하자 남편이 또 물었다. "나 인정 좀 해줘." 마지막에는 종지부를 찍었다. 나는 겨우 입을 열어 말했다. "응, 잘하고 있어."
인정을 갈구한 남편은, 정작 나는 인정해주지 않은 것 같았다. 나와의 놀이 도중에 그것을 제대로 마무리하지도 않은 채 남편과 놀이하는 곳으로 가게 하고, 신나게 놀이를 하면 나는 뭐가 되나 싶었다. 아이와 남편 앞에서 나는 제대로 놀아주지도 못하는 '무능한 엄마'가 된 것 같았다. 그러자 수치심이 고개를 들었다. 어릴 적, 나는 어리니까 당연히 미숙했고 엄마는 나를 사랑하는 것을 나를 대신해서 해주는 것으로 표현하시는 분이었다. 가장 많이 들은 말은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라는 말이었다. 나는 스스로 하는 것을 수치스러워했고, 내가 하는 모든 것, 내가 선택하는 모든 것에 자신감이 없었다. 나중에 에릭슨의 발달 이론을 배우면서, 나는 주도성 대 죄책감 단계에서 실패했음을 알았다.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양육자가 기회를 주어야 주도성이 키워지는데, 만약 그 주도성을 앗아가고 양육자가 모든 것을 대신 해준다면 아이는 주도성 대신 죄책감을 가지게 된다는 이론이었다.
나의 죄책감은 다른 사람 앞에서 수치심이 된다. 나의 수치심을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스스로 한 것에 대해서 그것이 비교가 되고 평가절하 될 때에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남편과 아이가 깔깔대며 좋아하는 데 대고 감정을 함부로 표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남편 '때문이' 아닌 남편으로 인하여 내 안에 일어난 화학작용 때문인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화학작용은 내 성장기의 경험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는 것도. 생각해 보면, 남편은 내 수치심이나 죄책감에 크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놀이를 하면서 짜증이 난 아이의 화를 풀어주고 그것으로 제가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을 보면 아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정서 수준을 가진 것 같기도 했다. 남편이 어른의 정서 수준이라면 내 기분을 모를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아이 역시 남편과 놀면서 짜증나던 것이 다 풀렸는지 기분이 좋아져서는 헤헤거렸다. 밤에 잠을 잘 때에도, 아까 놀이하던 것에 대해서 별말을 하지 않았다. 원래 자신이 맺힌 것이 있으면 잘 때 이야기를 하는 편인데 먼저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것이 그에게는 크게 남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만 이런 건가 생각하면 복잡한 마음이 드는데, 또 그것을 남편에게 이야기하려고 보면 싸움이 날까 봐 걱정이 되기도 하고, 또 남편은 남편 나름대로 노력을 했는데 그것을 탓하는 모양이 될까 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아이를 재우고 거실로 나간 나는 남편이 바느질을 하는 것을 보았다.
남편이 바느질을 하는 것은 아이 이불이었다. 애기 때부터 덮고 자던 이불인데, 그만 세탁기에 넣고 돌리다가 터져서 솜이 비어져 나왔다. 나는 그만 버리려고 했으나 아이는 버리지 말라고 했다. 꿰매서 다시 덮고 싶단다. 그것을 거실에 두고 오늘까지 바느질을 하려고 했는데 잊어버렸다. 그 이불을, 남편이 꿰매고 있었다. 드라마를 보면서 조용히 바느질을 하는 남편을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남편은 남의 마음은 잘 모르지만, 또 내가 잊은 것을 기가막히게 찾아내서 하는 사람이다. 사람이 뭐든 다 잘할 수는 없다. 그리고 나는 굳이, 못한 것만 찾아내어 그와의 관계를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이것은, 지난 십여 년 간 같은 상황에서 수없이 그를 지적하며 생긴 나름의 노하우였다. 지적해도 바뀌지는 않고 관계만 틀어지니까 내린 결론 같은 것이다. 나는 고맙다고 이야기를 하고 방으로 돌아와, 내 표현하지 않은 감정을 글로 늘어놓는 중이다.
투명한 관계가 좋다고 하지만, 아무런 선도 없이 서로의 모든 것을 다 아는 관계가 반드시 좋다고는 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상대가 받아들이기 힘든 말은 안 하는 것이 낫다. 지난 십여년 간의 세월을 지나 나는 깨달았다. 남편은, 내 말을 온전히 들어주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러기에는 그는 저 혼자 그러안고 있는 상처가 많은 사람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남편이 하는 말을, 나는 이제까지 공격으로 들었다. 이해하고 사랑해달라는 말이 아니라. 남편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하는 말을 그는 자신이 잘못했다고 지적하는 말로 들었다. 그래서 내가 그런 말을 할 때 남편이 하는 대답은 이랬다. "나 그래도 000 이거 했잖아!"
언젠가는 오늘 일을 말하는 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저 나 혼자 안고서 자고 싶다. 말하지 않은 말은 언젠가는 터지고, 하지 않은 말들이 쌓여 큰 싸움이 된다고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거다. 오늘 서운했던 것은 남편의 행동도 있었지만 그보단 나의 자격지심과 죄책감, 수치심이 작용한 결과이니까. 아이와 더 잘 놀고 싶었고, 아이에게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고, 그래서 그런 감정이 들었다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곤란했을 때 아이를 데리고 놀아준 남편에게 고마운 마음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