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찾아가는 행복
어린이집에는 모임이 많다. 공식적인 모임도 있고, 비공식적인 모임도 있다. 공식적인 모임은 어린이집의 유지와 친목을 위한 최소한의 모임이다. 비공식적인 모임은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이날 이날 여행 가니까 갈 사람 모여!" 처럼 불러서 시작되는 모임이다. 혹은 같은 연령 엄마들끼리 약속을 하고 모임을 만들기도 한다.
나는 공식적인 모임은 물론이고 비공식적인 모임도 대부분 갔다. 까닭은 아이를 데리고 할 것도 없는데, 그런 모임에라도 가서 놀아야 아이도 나도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혹은 아이를 두고 어른들끼리 모이는 날도 있었는데 그런 날도 나는 거의 빼지 않고 갔다. 가서 별 것 하지 않고 앉아만 있다 와도, 괜히 가서 시간 낭비했다고 생각할 때도 가긴 갔다. 그것은, 내가 이제껏 자라온 습관이기도 했다. 가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모임이 생기면 가서 앉아라도 있어야 속이 편해지는 그런 습관. 이제까지는 딱히 그런 습관이 불편하지 않았다.
모임이 불편해진 것은, 나를 미워하게 된 그 사람 때문이었다. 그 사람이 인근 거리에서 앉아만 있어도 온 세상이 그 사람으로 가득 찬 것 같고, 그 세상이 나를 밀어내는 것 같았다. 이것이 쓸데 없는 생각이고 실제로는 그렇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도 마찬가지였다. 공식적인 모임에서 어쩔 수 없이 그를 보았을 때는 하루종일 기분이 좋지 않으면서 그의 생각만 났다. 그러니 나는 모임 자체가 점점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등하원도 그를 피해서 하고, 공식적인 모임을 가도 그와 최대한 마주치지 않았다. 어쩌다 마주치는 일이 있어도 딱히 인사를 하거나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함께 있었고, 굳이 인사를 하지는 않아도 될 상황이었기에 나는 자연스럽게 그를 피했고, 그도 나에게 굳이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전에는 내가 모르고 지나가면 불러 세워서라도 인사를 하는 사람이었기에 이렇게 된 것이 퍽 속상하고 마음도 아팠다. 하지만 인사를 해도 어차피 내가 볼 것은 똥씹은 표정과 무시였기에,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서 내 최선을 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비공식적인 모임을 제안했다. 그 전에도 비공식적인 모임은 계속 있었고 나는 굳이 안 가도 될 모임에는 가지 않았다. 실제로 그날 다른 약속이 있거나, 아이가 아프거나 해서 빠져야 할 핑곗거리들이 있기도 했다. 그런데 이 날은 날도 좋았고 딱히 핑곗거리도 없었고, 무엇보다 아이가 좋아할 모임 같았다. 나는 마음이 아팠다. 내가 불편하다고, 아이의 즐거움까지 빼앗아야 하나? 아이는 그곳에서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텐데. 물론 나는 가면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게 되겠지만, 그렇다고 아이까지 피해를 보게해야 할까?
남편은 나나 그 사람이나 똑같다고 했다. 그 사람이 나를 피하는 것이나 내가 피하는 것이나 매한가지라는 것이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그와 함께하는 모임을 굳이 피하는 것에 대해서 나를 이해하지 못 하는 이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나를 거절하는 것이 두렵고 무서운 사람이다. 나를 거절하는 사람 앞에서 나는 그 사람의 마음에 공감해 버리고, 내가 그곳에 없어야 한다는 것을 느껴버리고 만다. 누군가는 내가 지나치게 휘둘린다고 생각하겠지만 휘둘려도 어쩔 수 없다. 내가 그런 것을 어찌하겠는가.
나는 내가 모임에 가지 않게 된 후 얻게 된 유익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것마저 생각하지 않고는, 내가 이렇게 사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일단 나는 모임에 가지 않은 이후에 책을 많이 읽게 되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원인이기도 한데, 그 사람의 행동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진짜 목숨을 걸고 대판 싸운 것도 아니요, 갈등이 있긴 했지만 서로 사과를 했는데, 여전히 몇 달이 지나도록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고 내 메시지에 답도 하지 않는 행동이 나로서는 정말로 이해 불가였다. 그는 이런 상황이 불편하지도 않을까, 내게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도 않는 걸까 싶기도 했다.
다양한 책을 읽으며,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인격 장애, 성격 장애 등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괜찮은 척' 살아가고 있지만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괜찮지는' 않다. 예전에 근무했던 곳에서는 사람 좋아하고 친절하며 누구에게든 호감형인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나에게도 무척 호의적이었다. 한 번은 내가 무슨 일로 밥을 먹지 못했을 때가 있었다. 어떤 속상한 일로 그냥 밥을 먹는 대신 산책이나 하고 오겠다고 하고 나갔다가 왔는데, 그가 내 밥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다가 나를 안아주었다. 그 순간에 나는 이 사람이라면 내가 뭐든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런 그가 돈을 횡령하고 한순간에 도망가 버린 것을 그래서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신을 믿는다, 언제든지 돌아오라는 메시지까지 보낸 것은 그런 이유였다. 하지만 그는 내가 보지 않는 곳에서 숱하게 내 욕을 했다. 그가 하는 말의 반 이상이 거짓말이었다.
사람들은, 자신과 친하다는 이유로 도저히 용서하지 못할 부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들도 용서를 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감옥에서도 친구는 사귈 수 있고, 아무리 극악무도한 범죄자라도 지인들은 있다. 이 글의 주인공인, 나를 싫어하는 그 사람 역시 나와 틀어지기 전에도 여러 이해할 수 없는 면모를 드러냈었는데 그때는 신기하게도 그것이 다 용서가 되고 크게 여겨지지 않았었다. 그러니, 결론을 내리자면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괜찮지는 않지만, 사람들은 친하면 일단 '괜찮은 것'으로 여기는 경향 때문에 그것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책을 통해서 나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알게 되었고, 내가 무조건 사람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진리도 알게 되었다. 특히 교회와 같은, 무슨 공동체, '사랑'으로 맺어진 집단 같은 곳에서는 더더욱 사람을 거꾸로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곳에서는 용납하고 사랑으로 덮어주기 때문에 더더욱 인격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활개를 칠 수가 있다. 이들을 잘 분별해 내고, 거리를 둘 줄 알아야지 이런 집단에서 상처받지 않고 오래 생존할 수 있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유익은, 무조건 다른 사람들처럼 살지 않아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이들이 모두 영어를 배운다는 이유로 불안함에 영어를 배우게 하는 것과 상통할 지도 모른다. 다른 아이들이 캠프를 간다고, 우리 아이까지 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물론 아이에게 좋은 체험이고 좋은 기회고 좋은 추억이 된다면 갈 수도 있지만 그것이 나에게 그토록 힘들다면 굳이 갈 필요가 있을까. 아이에게는 그것 외에도 더 좋은 추억을 쌓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아이에게 그런 특별한 추억보다 더 중요한 것은 '평온한 일상'이다. 교외로 놀러 나가서 실컷 놀고 나서 다음 날 부부가 다툰다면 아이는 차라리 놀러 가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추억마저 아이의 상처가 되었을 테니 말이다.
이렇게 생각해도 여전히 억울함은 남는다. 그 사람만 아니었으면 고민도 안 해 보았을 일을, 그 사람만 아니었으면 가서 같이 즐거운 추억을 남겼을 일을, 나는 그 사람 때문에 포기해야 하고 또 앞으로도 포기해야 할 일이 종종 있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이것은 그 사람 때문이 아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나오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니요, 그 사람이 불편한 것은 나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 역시 내가 불편해서 안 나올 수도 있는 것을 먼저 가겠다고 한 것은 그것을 감수하고라도 가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감수할 마음이 있다면 갈 수도 있다. 그리고 가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은 하등 잘못한 일이거나 내가 무슨 중요한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니다. 모든 일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선택할 수 있고, 그것을 좋게 혹은 좋지 않게 만드는 것은 그것에 대한 내 태도이지 선택 자체가 아니다.
그러니 간다고 하면 갔을 때의 어려움을 감수하고 또 가지 않을 거면 가지 않을 때의 아쉬움을 감수하면서 어떤 것을 선택했든 그것을 최선으로 만드는 노력을 하면 될 일이다. 어떤 삶의 성패가 어떤 길을 가고 가지 않고로 나뉜다면 사람들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불안함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그 길을 가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를 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을 받아들이는 삶으로 나아간다면 삶은 훨씬 윤택하고 풍요로운 것이 될 것이다. 어떤 선택에 얽매여서 마음 졸이지 않고 무엇을 선택해도 삶은 가치 있고 나에게 이로운 것이라는 확신이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