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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나비 Oct 27. 2024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

미움 받고 나서 배운 것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기 전, 내게 세상은 둘로 나뉘었다. 하나는 내가 있어도 되는 세상, 또 하나는 내가 없어야 하는 세상.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기 전, 어린이집에서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물론 지금은 그것이 그들의 적당한 거리 유지였다는 것을 안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모든 부모들에게 만족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것을 티내지 않는 예의를 지켰을 뿐. 그 예의를 지키지 않는 사람이 생기자, 나는 마치 보고 싶지 않았던 진짜 세상을 본 것처럼 당황스럽고 아연해졌다.


하지만 분명히 깨달아지는 것은 있었다. 그것은, 무엇이든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것이다. 어린이집이 다 내 마음에 들 수 없으며, 거기에 있는 모든 부모들과 내가 마음이 하나가 되어 사랑을 나눌 수도 없다. 몇몇은 나와 맞지 않을 것이고, 몇몇은 나와 맞을 것이다. 또 사람에 따라 어떤 사람은 이런 부분은 나와 맞는데 저런 부분은 나와는 안 맞을 것이다. 백프로 내 마음에 맞는 사람도 없고 모든 것이 다 내 마음에 드는 기관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 공동체도 없다. 다만 서로 예의를 지키는 공동체는 있을 수 있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아, 어린이집 너무 싫다. 빨리 졸업하고 싶다.' 솔직히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그 사람 하나뿐이고,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트러블이 없는데도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괴로워했었다. 어린이집 관련된 것만 봐도 싫었고, 어린이집 관련된 일도 싫었다. 오히려 어린이집에는 나에게 예의를 지키는 사람, 내가 인사를 하면 웃으면서 받아주는 사람이 절대적으로 많은데도 나는 그런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오늘 나는, 무슨 일로 어린이집을 작년에 졸업한 엄마와 길게 통화를 했다. 그 엄마는 배우는 것을 좋아했고, 삶이 바쁘지만 또 따뜻하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주고 배려해주는 사람이었다. 그와 나는 많이 만난 것도 아니요, 말을 많이 섞지도 않았지만 나는 그를 대할 때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은 나를 미워하는 그와 비교하자면, 미워하는 엄마를 A라 두고, 내가 지금 말한 그 엄마를 B라고 두면 둘 다 따뜻한 느낌이긴 했는데 A는 자기 힘든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었고 B는 힘든 이야기를 안 하지는 않는데 결론이 '내가 잘해야지'로 나는 사람이었다. 내가 더 배우고 내가 더 반성하고 내가 더 노력해야지. 늘 그렇게 말하면서 정말로 배우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A는 자신이 힘든 이야기를 할 때 결론이 '내가 잘해야지'로 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직접적으로 '밉다'고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A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를 괴롭게하는 것에 대해 미워하는 마음이 들곤 했다. 그 대상이 A의 자녀라도 말이다. 하지만 B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런 감정이 들지는 않았다. 실제로 B도 자식들 때문에 많이 힘들었고 괴로운 시간들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B는 자식이기에 자신이 더 노력하고 그런 면들도 품어주는 엄마가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곤 했다. 그것이 A와 B의 근본적인 차이였다. 그래서 듣고 나면 A는 불쌍한 생각이 들고 때로는 A를 힘들게 하는 대상에 대한 분노가 치미는 반면 B는 따뜻한 느낌이 들고 아무 상관 없는 제3자인 내가 보듬어지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곤 했다. 나아가서 나는 과연 어떤 엄마인가를 돌아보게 되기도 했다.


오늘 그런 B와 길게 통화를 하면서, 내 이야기를 많이 한 것도 아닌데 괜히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B역시 어린이집에서 만만치 않게 상처를 받은 듯했다. B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A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아니었을 확률이 크다. A와 B는 실제로 가깝게 지내지도 않았으니까. B는 어린이집에서는 아이들로 인해 싫어도 좋은 척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이 사람도 참 싫은 것을 참고 견뎠을 때가 많았겠구나 싶었다. 


어린이집에는 나와 맞는 사람이 있고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 있다. A와 같은 사람도 있고 B와 같은 사람도 있다. 내가 13년 전에 그만 둔 학교에도 A와 같은 사람도 있었지만 B와 같은 사람도 있었다. B와 같은 사람은, 내가 학교에서 겉도는 것 같다면서 일부러 나를 데리고 독서모임을 만들어서 내가 어울리도록 했다. 그리고 같이 장을 보자고 나를 끌고 다녔다. 자신도 담임과 업무로 바쁜데도 나를 시시때때로 챙겼고 좋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학생들 때문에 고민을 하면 언제든 들어주고 좋은 조언들을 해 주었다. B와 같은 그 교사는 학생들에게도 인기 최고의 교사였다. 학생들은 그를 찾아와 다른 이에게 하지 않는 속얘기를 했었다. 공공연하게 그의 담임 반 아이들은 다른 반 아이들의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세상에는 늘 자기 반성을 하며 주변에 좋은 영향을 주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반대의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보통 같은 기관에 속해 있다. 하지만 B와 같은 사람들도 모든 부분에서 완벽하지는 않다. A와 같은 사람이라고 또 모든 부분에서 다 수준 이하인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은 절대적이지 않고 따라서 나만의 기준을 세우고 나만의 거리 조절을 하며 나만의 판단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기관이나 사람이나 그 무언가를 '의존'하지 말고 나 자신을 세우고 믿을 것. 오늘은 그 기록을 하고 싶어 이 글을 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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