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로 대할 사람에게 스트레스 받지 말자
며칠 동안 나를 미워하는 이의 생각으로 머리가 아팠다. 나는 왜 그의 생각에서 헤어나오지 못할까, 왜 그는 아직도 나를 미워할까, 내가 그렇게 미워할 짓을 했는가, 내가 찾아가서 무릎이라도 꿇으면 미워하는 짓을 그만 둘까, 그렇게 나를 미워하니 그도 언젠가는 망하고야 말 것이다, 하지만 그 망하는 것을 바라는 나도 그와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해결되지 않는 생각들이 그물에 걸린 쓰레기마냥 줄줄이 나왔다. 이것들은 '코끼리 생각은 절대 하지 마!'라고 했을 때의 코끼리처럼 머릿속에서 지워지지도 않았다. 그래, 차라리 그 생각을 더 하고 말지라는 생각에 일부러 심리학 서적들을 찾아 읽고 그에 대한 글을 썼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은 여러모로 유익했다. 내 본업에도, 그리고 나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에도, 나와 다른 이들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에도 유익하고 좋았지만 여전히 그 녹은 껌처럼 달라붙은 지저분한 감정은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 감정의 이름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그와 나 사이를 연결하는, 이제 그만 좀 떨어줘 줬으면 하는, 더럽고 불쾌하고 내 몸에 있는 것조차 너무나도 싫지만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그 감정의 이름은 '죄책감'이었다. 부모와의 잘못된 관계 속에서 형성된 '죄책감'은 내 마음의 기저에 있는 감정인데 이 감정은 툭하면 벌떡 일어나서 나를 지하 땅속까지 끌고 들어가곤 했다. 그런데 마침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죄책감'에게는 꽤나 좋은 기회이다. '너 때문에 너를 미워하는 거잖아.' '니가 잘못한 게 없으면 너를 왜 미워하겠어.' 죄책감은 내 안에서 제 몸피를 키우기 위해 이런저런 말을 마구 같다 붙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나를 미워하는 것은 그의 책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갈등이 있었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마음을 다해 사과했고, 그 역시 사과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후로 그는 나를 외면했고 말조차 나누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으며, 마음을 닫은 것도 그쪽이고 나와 인연을 끊기로 결정한 것도 그쪽이다. 그럼에도 나는 오랜 관성처럼 굳어진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어 괴로워하는 것이다.
우연히 어느 방송을 유투브를 통해 본 것은 내게 행운이었다. 이혼부부들의 사정을 살피는 그 프로그램에서, 한 정신과 의사가 부부 중 아내와 상담을 하는 장면이 유투브에 나왔다. 그 아내는 욕을 습관적으로 쓰면서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서 물건을 함부로 던지고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SNS에 올려서 반응을 듣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거예요. 절제를 못 하는 거고요. 지금 본인의 상태는 어린아이의 상태라고 보시면 돼요." 알고 보니 그는 어릴 때에 적절한 통제와 규제를 비롯한 훈육을 받지 않았다. 부모가 오냐오냐만 하며 키운 케이스였다.
설명을 듣고 보니 그랬다. 욕을 절제하지 못하는 것도, 또 SNS를 끊지 못하는 것도 모두 자기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그런 한편으로 그는 속으로는 매우 불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래서 어떻게든 자신을 검증 받으려 하고 모르는 사람에게라도 인정을 받으려 애를 썼다. 아파트 톡에 밤 12시에 번개를 모집을 해서 수다를 떨기도 했는데 그 수다의 대부분은 배우자에 대한 욕이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을 정당화하는 데 쓰고 있었지만 그런 그의 모습은 절대로 정당화해서는 안 되는, 여러가지로 문제가 많은 모습이었다.
어린아이들은 자아가 불안정하고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며 자기가 좋고 싫은 것에 대해서 감추는 것을 하지 못한다. 그는 그러한 모습을 하고 있었기에 정신과 의사는 '어린아이 같다'는 진단을 내리고 '이제부터 어른처럼 살아야 한다. 참을 땐 참고 견딜 땐 견뎌야 한다'고 충고를 했다. 그에 비해 그의 배우자는 지나치게 어른스럽게 모든 것을 다 감당하고 참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제가 참아야 할 몫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라도 배우자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사랑이었다. 그렇게 자신을 사랑하는 배우자를 그는 어떻게 했는가. 모든 것을 배우자의 잘못으로 돌리고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배우자 욕을 해댔다. 배우자와 대화를 할 때도 자신의 잘못보다는 배우자의 잘못을 더 크게 여기고 질책했다. 이것 역시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비로소, 나를 미워하는 이가 누구와 닮았는지를 알았다. 그리고 그 모습은 또 누구와 닮았는지도 알았다. 처음 말한 '누구'는 바로 어린아이이다. 자고로 어른이라면, 어떤 문제든 서로 이야기를 하고 사과를 받고 사과를 했으면, 그것에 대한 마음을 풀거나 풀기가 어려우면 적어도 연락을 통해 만나서 더 대화를 시도해 보았어야 했다. 나는 나의 사과에 그도 사과로 답을 하니 다 풀렸을 줄 알고 더 대화를 하지 않았는데, 그는 자신이 풀리지 않은 마음이 있었음에도 사과를 함으로써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없다는 메시지를 주고 나서 저 자신은 마음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그의 그런 모습은 또한 나와 닮았다. 지금은 변하려고 노력하지만 나 역시 어린아이처럼 내 남편에게 요구만 하고 그가 짊어지고 있는 짐은 바라보려고 하지 않았다. 남편에게만 고칠 것을 요구하고 내가 고쳐야 할 것들은 외면했다. 남편이 더 잘하고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만 생각하면서 어린아이같은 고집 속에 있었다. 내가 죄책감이 있다면 바로 그런 부분에 있는 것이고, 그것은 내가 노력하여 달라지면서 없어질 수 있는 것이다.
좀 더 분명하게 상황을 이해하고 나자, 내가 해야 할 대응도 명확해졌다. 누구도 어린아이의 대응에 크게 상처를 입지 않는다. 어린아이는 너무도 미숙하고 부족하여, 그의 판단과 행동을 절대 기준으로 삼는 사람은 없다. 다섯 살짜리 어린 아이가 '아빠 미워'라고 말했다고 해서 아빠 입장에서 '내가 정말 미워할 짓을 한 것인가'하고 깊이 반성하고 통회의 눈물을 흘리지는 않는다. 물론 아빠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그 말을 했다면 다를 수 있겠지만 아무 것도 안 했는데 '아빠 미워'라고 한다면 '뭐 기분 나쁜 일이 있었나' 생각하면서 달래주거나 그냥 넘어가거나 할 것이다. 아이가 그저 생각 없이 한 말일 수도 있고, 제가 기분이 나쁜데 그 책임을 아빠에게 돌린 것일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이들은 자기 잘못에 부모 탓을 많이 한다. 자기가 넘어져 놓고 '엄마가 물건을 거기에 두었기 때문이야' '엄마가 나를 갑자기 불러서 그래'라면서 엄마 탓을 한다. 그럴 때 엄마가 '아이고 우리 아이가 넘어지게 만들었으니 내가 죽어야지'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심각한 우울증 상태이므로 당장 병원에 가야 한다. 보통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아이라서 자기 탓을 하지 못하고 엄마 탓을 하는 구나' 생각을 하면서 아이를 달래주거나 혹은 '그건 엄마의 탓은 아니지'라면서 진실을 알려준다. 아이가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다치거나 상처를 받았을 경우에는 그저 아이를 달래주기만 할 때도 있다. 그럴 때도 엄마는 이것 때문에 크게 상처를 받지 않는다. 아이가 엄마 탓을 하는 까닭은 진짜 그것이 엄마 탓이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아직 그것을 객관적으로 볼 정도로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대부분의 엄마는 알고 있다.
하지만 비단 아이만 그런 것은 아니다. 몸은 어른이지만 마음은 아직 아이라서, 분명히 자기 탓이고 자신이 죄책감을 느껴야 할 일에 자기 탓을 하면 너무 아프고 힘드니까 그것을 남탓을 하면서 책임을 미루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을 투사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나르시시스트의 특징이기도 하다. 나르시시스트는 어린이의 자기중심성이 어른이 되어도 사라지지 않고 강화되어, 자신의 결점이나 부족함을 인정하지 못하여 그런 부분들을 모조리 남에게 투사해 버리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들은 사회화된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남과 함께 공감하며 더불어 사는 삶을 조금도 살 수 없는 사람들이다. 어떤 이유로 인해 내면이 파괴된 그들은 자신은 무조건 옳고 자신과 반대되는 타인은 무조건 그르며,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신을 받들고 살아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에 빠진 채 살아간다. 이것은 바로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가 나르시시스트인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행동은 충분히 어른답지 못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고려하고 나와의 사이를 현명하게 해결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으면서 그저 미워하고 있는 것은 확실히 성숙하지 못한 행동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대할 수 있는 최선의 선대는, 그를 어린아이처럼 대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말 어린아이를 대하듯이 '오구오구' 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를 어린아이로 여기고 그의 태도에 상처 받지 않으면서, 그저 너그럽게 그의 행동을 보아주는 것이다. 그의 행동에 어떤 죄책감이나 절망도 느끼지 말고 그와 나와의 거리를 멀리 둔 채로 '아직 어려서 그렇지'라고 생각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행동이나 태도가 나에게도 전염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나 역시 어린아이적인 면모가 많은 사람이지만 적어도 어른이 되고 싶은 사람이니까. 그처럼 그저 감정이 시키는 대로 싫으니 이야기하지 않고 미우니 피한다가 아니라, 싫어도 어른이기에 매너를 지키고 미워도 피하지 않고 웃으며 인사하는 것이다. 그러면 적어도 그는 변하지 않아도 '나를 미워하는 이를 대하는 나의 마음'은 바뀔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써도 내일이면 도루묵이 될 것 같지만, 그래도 오늘의 다짐을 도장처럼 찍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