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선한 분위기의 소닉 프로젝트를 뒤로하고 제가 이동한 다음 프로젝트는 '말레피센트2' 였습니다. 컴프 수퍼바이저와 리드의 안내를 통해 대략적인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을 들었죠. 중세 판타지풍의 영화는 처음이었기에 설렘이 큰 프로젝트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프로젝트 초반에는 '키 아티스트'라고 불리우는 아티스트들이 각 장면의 분위기나 컨셉을 다른 부서들과 같이 만들어 나갑니다. 제가 왔을 당시에는 어느정도 장면들이 만들어져 있어서 그것에 맞추기만 하면 되는 다소 편한 작업위주였습니다.
하지만 중간중간 난이도 있는 장면들도 주어졌었는데요. 계속해서 슈퍼바이저나 리드들에게 어필을 해서 좋은 장면들을 가져올 수 있도록 해야했습니다. 책임감이 뒤따르는 일이지만, 그만큼 좋은장면들, 재밌는 장면들을 작업할 수 있다면 충분히 감수할만한했죠.
제 포트폴리오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있는 '말레피센트2'의 작업기와 그리고 마지막 출근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극중 말레피센트는 동료의 안내를 받아 얼음과 정글과 사막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들어가게됩니다. 그리고 각각의 공간을 날아다니며 그 곳에서 적응해 가며 살고있는 요정들을 보게되죠.
이 장면을 구현하기 위해 가장 신경쓴 부분은 아무래도 상반된 두 공간이 '어떻게' 이어져있느냐 일텐데요. 컨셉아트를 통해 전체적인 분위기를 잡은 뒤 3D 파트에서 기본골격을 만들어오면 제가 있는 파트에서 마무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제가 하던 작업중에 하나는 '얼음' 지역과 '정글' 지역이 이어지는 구간을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재료와 컨셉아트도 준비되어 있어서 초반 분위기를 잡는데까지는 수월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이 장면을 '현실감' 있게 구현해 내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이를 위해선 현실에서 참고가 될만한 장소를 찾아 레퍼런스삼아서 진행하는 일이 필요했는데요.
그 레퍼런스가 될만한 장소가 '툰드라' 였습니다. 완벽한 예시가 될 순 없겠지만, 이미지안에서 '얼음' '푸른 생명체' 들이 어떻게 공존되어 살아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죠. 이를 참고삼아 디테일들을 추가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도시나 자연환경같은 장면을 작업할때에 중요한 부분이 디테일을 얼마나 잘 표현했는가 입니다. 도시의 경우 인공물들의 재료나 각각의 특성이 있기 때문에 이를 표현하기가 자연물보다 수월한 경우가 많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건물들의 손상된 정도라던지,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는 움직이는 생명체들(예를들면 새, 쥐?), 연기 등을 추가시켜주면 조금더 리얼한 장면을 만들 수 있습니다.
자연의 경우는 좀더 까다로운 경우가 많은데요. 자연물들의 불규칙적인 배치와 움직임, 시간과 습도에 따른 변화등을 표현시켜줘야 좀더 리얼한 장면을 만들 수 있기때문에 도시보다는 까다로운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장면을 만드는일은 좀더 손이 많이갑니다. 실제 있을법한 장면을 만들어야 하기에 '그럴듯' 하게 디테일을 추가시켜주는것이 필요한데요. 까다로우면서도 흥미로운 부분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누구도 정답을 모르기에 제 아이디어를 추가할 수 있고, 실제로 그것이 리얼하게 보인다면, 제 아이디어가 채택되어 실제 상영관에서 보여지게 되는 것이니까요.
물론 힘든 지점도 많습니다. 슈퍼바이저의 방향성안에서 이런 디테일을 추가하기가 쉽진 않거든요. 자칫하면 데이터가 너무 무거워져서 시간내에 완성물을 못만들어낼 수도 있고요. 이상과 현실의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가며 일을 하는게 제 직업의 특성이라 할 수 있겠네요.
수많은 미팅과 야근을 거치며 프로젝트는 완성되어 갔습니다. 좀 더 리얼한 장면을 위해 여러가지를 테스트 해보고, 수정해갔죠. 그 과정에서 여러 논쟁도 있었고, 화합도 있었고, 즐거움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즈음이 되어 전 마지막 출근을 준비해야 했죠.
이 글에서 언급은 하지않았지만 전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굳히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인데요. 제가 좋아하는 작업들을 한국에서도 할 수 있다면? 굳이 이곳에서 버티고 있을 필요는 없겠다 싶은 것이었죠. 다행히 그곳에서도 제가 이 곳 생활을 충분히 마무리짓고 와도 된다고 하며 배려도 해주었고요. 그렇게 저는 마음을 정하고 프로덕션 매니저를 통해 마지막 출근을 알렸습니다.
'잠깐 시간좀 내줄 수 있을까?'
'그럼, 무슨일이야?'
'나 이번 프로젝트를 마지막으로 한국으로 돌아가려해. 마지막 날짜는 00월 00일로 하고싶은데, 괜찮을까?'
'우리 다음 프로젝트도 예정되어 있었는데 아쉽게 됐네. 응 그 날짜라면 괜찮을 것 같아. 그동안 고생많았어.'
이렇게 마지막 출근날까지 정해지고, 저는 프로젝트를 최대한 마무리 짓기위해 온 신경을 쏟았습니다. 프로젝트가 마무리되는 시점이 되면 같이 사진을 찍고 식사를 하는데요. 다행히 그 때까진 있어서 모든 이벤트에 참여할 순 있었네요.
그리고 이 시기즈음이 되어 동료들에게도 마지막 출근 사실을 알렸습니다. 많은 친구들의 한국으로의 복귀를 축하해주기도, 섭섭해해주기도 했죠. 그리고 마지막 인사를 담은 편지를 받았는데요. 직장에서 이런 것을 받아본 것은 처음이라 큰 감동이었습니다.
그리고 2019년 9월 13일 저녁 퇴근길에 나섰습니다. 영어도 서툰 저를 받아주고 멋진 프로젝트에 참여할 기회를 준 회사가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덕분에 먹고 사는 걱정없이 오로지 작업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이상하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더군요. 늦은시간까지 야근을 같이한 동료들과의 마지막 사진을 찍으면서 그 섭섭함을 달랬는데요. 먼 타국에서 영어도 서툰 제가 일을 할 수 있었던 건 주위 동료들 덕분이었습니다. 이렇게 마지막날까지 함께한 동료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저는 하루를 마무리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