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까지 청취하지 않으면 위약금 내야 한다 너!
엄마, 나는 그림책들이 진짜 좋아. 재미있어.
엄마도 그래. 너무 재밌어.
그래서 엄마는 동화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
응, 오래오래 되고 싶었어.
나는 엄마가 꼭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엄마의 잠 잘 오는 이야기가 그림책보다 재밌거든.
나 스무 살 돼도 매일 밤 들려줘.
우리 집에서는 매일 밤 이야기극장이 열린다. 처음에는 그냥 토닥이며 시작했던 이야기가 이제는 제법 구색을 갖추어 라디오처럼 청취자 여러분(그래 봐야 한 명)도 부르고 사연도 받는다. 그래도 나의 "잠 잘 오는 이야기" 프로가 꽤 인기가 많아(?) 매일 아침마다 오늘의 이야기 주제를 요청하는 청취자도 있고, 매일매일 사연을 이야기하거나 포스트잇에 적어 등에 붙여주는 청취자(앞에 애랑 같은 애)도 있다. 청취자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느라 삼천포로 흐르기 일쑤지만, 만화도 안 보고, 유튜브도 안 보는 우리 집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책도 단숨에 이겨버리니 이야기꾼을 평생의 꿈으로 삼아온 내게 깊은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이들은 아이를 낳고 꿈을 놓거나 직업을 놓았다고 말한다. 물론 나의 경우도 시선에 따라서는 아이를 핑계 삼아 휴직계를 던진 이 시대의 엄마겠지만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나는 아이로 인해 꿈을 더 다지는 셈이다. 내가 우리 아이보다 조금 더 컸을 무렵부터 내 장래희망은 동화작가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없는 솜씨에 왜 그리 한 우물을 파려고 했을까 아쉬워지지만, 꾸준함만큼은 나 스스로도 대견하다.) 길다면 긴 시간을 꿈꾸고도 아무도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지 않았는데, 나의 아이는 매일 밤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를 기다리지 않는가. 내 이름 석자 적힌 책이 세상 밖에 영영 나오지 못해도 조금은 덜 아쉬울 것 같다.
이제 여섯 번째 생일을 앞두고 있는 우리 집 녀석의 꿈은 두 가지다. 우주비행사와 보석 디자이너.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은 이유는 자신이 지킨(?) 지구가 정말 초록색인지 보고 싶어서이고, 보석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이유는 엄마는 커다란 반지가 없기 때문이다. (있긴 있어.. 예물반지.. 엄마 스타일이 아니라 끼지 않는 거야...) 아이가 처음 보석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이유를 말했을 때 나는 울었다. 작고 보잘것없었던 내가 누군가의 꿈의 이유라니. 누군가의 꿈이 된다는 게 어떤 감정인지 안 당해본(?) 사람은 모른다.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살고 싶어지는 말랑하고 따뜻한 마음.
내가 누군가에게 꿈이었던 적이 또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었던 것 같다. 아이처럼 나를 오롯이 바라보는 존재가 또 있었나. 아이에게만큼 내가 절대적 사랑이었던 순간이 있긴 있었을까. 엄마가 된 후 나는 절대적인 사랑이 무엇인지, 나보다 더 사랑하는 게 무엇인지를 배웠다. 그렇게 나는 어설픈 엄마가 된 동시에, 한 사람의 완벽한 팬이 되었고, 서로를 응원하고 사랑하는 영혼의 짝꿍을 하나 얻었다.
우리 아이가 보석 디자이너나 우주비행사가 되지 않아도 된다. 아직 어리기에 그 꿈이 앞으로 몇 번 바뀔지도 모를 일이지만, 아이가 나처럼 하나의 꿈만 꾸기보다는 여러 가지를 꿈꾸고, 여러 가지를 배워보면 좋겠다.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꿈을 꾸고,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면 좋겠다. 한 가지 꿈을 이루더라도 또 새로운 꿈을 꾸고, 도전하는 사람이면 좋겠다. 나 또한 그런 아이의 도전에 늘 박수로 응원하는 엄마가 되고 싶다. 아이가 어떤 어른이 되어가든, 어떤 모습이 되어가든 그 모습 그대로를 응원해주고 싶다. 아이가 자라며 미운 짓을 하는 날도 올 테고, 화가 나는 날도 올 테지만 아이가 처음 엄마를 위해 보석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는 말을 했던 시간을 잊지 않고 살 수 있기를 바라본다. 그래서 한결같이 "너라서 응원해"라고 말해줄 수 있는 엄마로 남을 수 있으면 좋겠다.
내일 계약서를 하나 써야겠다. 나는 아이를 그저 한마음으로 꾸준히 응원한다는 조항으로, 아이는 정말 20살까지 엄마의 잠 잘 오는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그리고 엄마에게 고맙다는 카톡도 하나 보내야지. 이렇게 나이 먹도록 꿈을 꾸며 사는 아이로 키워줘서, 진짜 감사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