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적이 있나요?

딸과 함께 슬램덩크를 영화관에서 보다

by 정석진

집안 가장으로서 지금까지 두려울 것 하나 없이 살아왔는데, 그런 내게 언젠가부터 아킬레스건이자 천적 같은 존재가 나타났다. 남편을 최우선으로 하는 아내 덕에 기고만장 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를 쭉 펴고 거칠 것 하나 없는 평탄한 삶을 살아왔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흘러간 옛 노래에 지나지 않고 겨우 마음뿐이고 다시는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바로 딸 때문이다. 이십 대인 딸은 전적으로 무조건 엄마 편이다. 간혹 아내와 설전을 벌일라치면 홍길동처럼 등장해서 매서운 한 방을 날린다. 반박하고 싶지만 딸의 공격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다. 감정이 앞서고 구태를 내세우는 나로서는 공격해 봤자 잽도 안된다. 붙어 봤자 피해만 막심하다. 때로는 자존심을 앞세워서 소리를 질러보지만 솜방망이로 바위를 치는 격이고 헛발질일 따름이다. 그래서 겨우 할 수 있는 반격이란 안 들리게 구시렁 대는 것 밖에 다른 묘수가 없다. 그런 상황을 아내는 은근히 즐기는 것 같고 때때로 그저 흐뭇해서 모자란 사람처럼 입이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는 눈치다. '아휴 내 팔자야!'


딸의 구박은 집안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가족들과 함께 나들이를 나가서 가장 많이 잔소리를 듣는 사람도 항상 나다.


최근에 딸이 TV로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길래 함께 보게 되었는데, 아주 오래전에 유행했었던 농구 소재의 만화였다. 보면서 주목이 된 것은 내용이 아니라 주인공의 표정과 말이 과장과 오버 일색으로 정신나간 사람 처럼 괴성을 질러대는 것이었다.

정말 내게는 뜬금없는 만화 영화 '슬램덩크'였다.


설 연휴 마지막 날, 딸과 둘이서 조조영화를 보러 갔다.

요즘 이 영화가 다시 유행이라고 한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연휴 마지막 날이고, 날씨도 추운데 혼자 가서 보는 것이 마음이 쓰여 운전도 해줄 겸 따라나섰다. 조조였기에 휴일인데도 평소처럼 일어나 분주하게 준비를 하고 나갔다. 나는 영화관에 가면 영화를 보면서 팝콘을 먹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일찍 일어나서 대강 아침을 때웠지만 시간에 맞춰 늦게 일어난 딸은 아무것도 먹질 못해 배고파했다. 팝콘은 자기가 산다면서 딸이 주문을 했다. 의외로 이른 시간인데도 영화관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어디를 가나 웬만한 주문은 키오스크가 대신하는 시대가 되었다. 편한 면도 있지만 정이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은 지울 수 없다. 내 몫으로 캐러멜 팝콘과 오란다 주스를 선택했고 딸은 팝콘과 제로콜라 그리고 핫도그를 픽했다. 주문한 것을 받는데 내 팝콘 양이 갑자기 너무 적어 보였다.

"사이즈를 큰 것으로 할걸." 하는 말에 "하나 더 주문할까? " 했을 때 내 생각으로는 추가 금액만 지불하고 대용량으로 바꾸면 될 것 같았다. 매대에 갔더니 주문해서 나간 것은 안된다고 한다. 수긍이 안되어 왜 안되느냐고 따졌다. 딸이 만류를 했는데도 한 번 더 바꿔달라고 했더니 이번만 해드린다고 하면서 받아들였다.

뒤에 보니 결제한 내역 모두를 취소를 하고 다시 결제를 해야 했다. 딸의 눈치도 보이고 어린 직원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직원은 짜증이 났는지 인상을 쓴 채 던지 듯 팝콘을 건넸다. 나는 지은 죄가 있어서 그러려니 했는데 딸은 그 행동을 못마땅해했다. 내 평소 같으면 절대 넘어가지 않고 혼을 냈을 상황인데, 수용해 준 직원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건넸다.


딸은 아빠도 진상이지만 저렇게 무례한 직원도 못됐다며 기분 나빠했다. "그렇게 절차가 까다로웠으면 그냥 하나 더 시킬 걸 그랬네" 멋쩍게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자리를 찾아가니 관람석이 거의 찼다. 그만큼 인기가 있다는 방증이어서 기대가 되었다. 극장에 앉아서도 딸은 내게 주의를 준다.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넸더니 영화가 시작되면 말 걸지 말고 조용히 보라고 주문을 했다. 영화를 볼 때 나도 모르게 타인들이 들릴 정도로 큰 목소리로 떠들었던 적이 많았던 것이다.

기분이 좋은 말은 아니었지만 수긍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팝콘을 먹으면서도 딸에게 들은 말이 있어 조심을 했다. 여러모로 꼰대가 하는 행동들이 내게 너무 많았나 보다.


화면은 디즈니나 픽사에 비해 너무 단순하고 평범했다. 내용이 그만큼 중요했던 것이었을까?

형제의 이야기로 영화는 시작됐다. 아버지를 잃은 가정에서 형제는 어머니를 우리가 지키자고 눈물의 다짐을 한다. 그런데 산처럼 따랐고 농구도 특출했던 형이 바다사고로 죽는다. 그 상처를 안고 빨간 손목 보호대를 형의 분신으로 여기며 형을 넘어설 수 없다는 좌절을 겪는다. 주인공은 이런저런 사고도 치면서 형이 소원했던 고교 대회 결승전에 선다.

참으로 놀라운 점은 영화 내내 고교 최강팀과의 결승전 한 게임으로 영화를 이끌어간다는 점이다. 중간중간 다양한 스토리가 곁들여지는데 주인공의 성장기이면서 따스한 가족애도 그려진다.

몰입감이 확실히 있었고 볼만한 영화였다. 딸은 너무 재미있게 봤다면서 후속작이 나오면 또 보고 싶다고 했다. 딸이 재미가 있었다고 하니 함께 온 보람이 느껴졌다. 그리고 몇 가지 에피소드가 있었음에도 마음을 열고 기꺼이 딸의 말을 수용을 했더니 별 탈 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되어 아주 좋았다.

딸과의 관계정립이 생각보다 쉽지는 않다. 수긍이 안되고 이해가 안 되는 면도 많이 보인다. 하지만 타당하고 합리적이고 올바른 이야기도 많다. 이해와 수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물론 다른 시대를 살아왔기에 변화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 있다. 굳어진 사고방식을 하루아침에 바꾸기는 분명 쉽지 않다. 그리고 지금이 무조건 다 옳은 방향이라고도 볼 수 없다. 그럼에도 과거에만 매여 고집을 부리고 주장만 하게 되면 자꾸 부딪히게 되고 외면받게 되며 함께 할 수 없게 된다. 이는 명백하게 득 보다 실이다. 나이가 들면 입을 다물고 귀를 열어라고 조언하는데,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금과옥조가 아닐 수 없다.


생각을 조금만 바꿔도 큰 변화가 온다. 딸과 같이 영화 한 편을 같이 봤을 뿐인데 그냥 좋다. 그게 가족이란 거겠지...

슬랭덩크 포스터 네이버 이미지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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