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 없이 느긋함으로 어슬렁 거리며 걷는 것이 산책이라지만 목적지를 정해두고 주위를 돌아보며 가는 길도 산책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성북도서관 관련 일정이 오전에 있었다. 집에서 가까운 거리여서 걸어서 천장산을 넘어가는 길을 택했다. 오전에 비가 뿌렸는지 습도가 높고 하늘도 잿빛이지만 나무들은 초록초록 싱그럽다. 도서관에서 가까운 한예종까지는 따릉이를 탔다.
학교 초입에 이미 져버린 벚나무 사이로 겹벚꽃이 소담스럽게 피었다. 홑잎 꽃도 아름답지만 풍성한 꽃잎의 겹꽃은 또 다른 우아함을 풍긴다. 넉넉한 마음을 가진 푸근한 사람을 만나는 기분이랄까? 커다란 한 그루 나무를 뒤덮은 수많은 꽃송이가 탐스럽다. 봄을 풍미하는 벚꽃이 진 후에 피어나 그나마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니 지혜로운 꽃이 아닐까 싶다.
겹벚꽃
경사진 길을 오르자니 호흡이 가쁘다. 겹벚꽃도 성질대로 이미 피었다 지는 녀석들도 있다. 길가에는 철쭉이 한창이다. 이 시절에는 어디나 피어 언제나 볼 수 있어선지 존재감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흔한 꽃이 갖는 숙명이 아닐 수 없다.
한예종의 교정에는 작은 연못이 있다. 못에는 수련이 자란다. 수련 잎들이 어려 보이는데도 꽃봉오리가 맺혔다. 꽃이 피면 촛불 밝혀 놓은 듯 어여쁘다. 연못 주위에는 난초가 호위하듯 날렵한 몸매를 뽐내며 푸르름을 더하고 영산홍도 못 주위에 피어나 붉은 자태로 푸른 풀빛과 선명한 대조를 보인다. 돌틈사이에 정숙하게 빛나던 돌단풍은 한창때가 지나 흰 빛을 잃어가도 자태는 여전히 곱다. 못가에 드리운 소나무가지와 정자가 어우러져 빛나는 계절의 멋진 풍광을 빚고 있다.
눈개승마가 울창하게 자라는 곁에 화려하고 탐스러운 꽃송이가 눈길을 끈다. 크기와 아름다움으로 문인들의 사랑을 받아온 목단이다. 꽃송이가 큼에도 불구하고 진홍빛 꽃잎이 선녀의 옷자락 같이 부드럽고 꽃술이 금빛으로 빛나 여왕 같은 도도한 자세로 피기 시작했다. 피었다가 곧 지고 마는 순간이 주는 아름다움이기에 꽃은 더 아름다운 것이리라.
목단
천장산 초입은 키 큰 나무들이 옹위하고 있어 바닥에 비의 흔적이 보이질 않는다. 나뭇잎들이 빗물을 다 차지한 까닭이다. 숲은 초록빛을 머금고 있지만 온통 푸른빛이 넘실대는 신록으로 가득하다. 흐린 날인데도 싱그러운 나뭇잎들로 주변이 환해서 오늘의 흐린 날씨를 잊게 만든다.
천장산 숲길
산 중턱에 노란 물감이 번져난다. 황매화의 겹꽃인 죽단화가 한가득 피었다. 겹꽃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데 그래서일까? 여백이 없이 빽빽하게 핀 꽃들로 눈이 부시다.
죽단화
숲에도 꽃이 천지다. 팥배나무마다 흰 꽃송이를 달고 산을 온통 뒤덮고 있다. 푸른 잎들과 함께 피어 흰빛이 선명하게 도드라져 보인다. 산벚꽃이 진자리에 또다시 흰꽃송이가 산을 치장하고 있다. 이따금 산비둘기가 날씨를 대변하는 것처럼 처량하게 꾹꾹 거린다.
팥배나무
지금 자연은 봄의 중심에서 가장 화려한 순간이다. 아쉽게도 사람들은 저마다 분주해서 계절이 바뀌는 것을 잊어버리고 산다. 주변이 푸른빛으로 물들고 온갖 꽃들이 피어나는 황금 같은 봄날은 너무도 빨리 지나간다. 오늘의 일정 속에서 우연히 수많은 봄의 전령들을 만났다. 이토록 아름다운 순간은 오래가지 못한다. 지금 여기는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이다. 뒤로 미루다 보면 어느새 다른 계절이 우리 앞에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한창인 봄을 그냥 보낼 것인가? 지금도 아직 늦지 않았다. 봄이 선사하는 빛나는 아름다움을 놓치지 말고 만나는 행복한 주인공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