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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유랑경음악단 Jan 03. 2020

14회 여행을 마치며

시베리아 황당열차

1. 우리가 사는 곳


12시간이 넘는 비행시간을 보내고 인천으로 가까워지기 시작할 때 즈음, 비행기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우리가 대부분을 잊은 채 지냈던 사실 하나를 떠올려준다.
우리가 사는 곳이 이렇게나 작다는 것. 목화솜처럼 뿌려진 구름 사이로 파란 건 바다요, 녹색은 산이고, 갈색은 땅이로다. 그 풍경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갈색 사이사이로 오밀조밀 점보다 조금 큰 사각형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장난감 레고 블록들 보다 훨씬 더 작은 우리는 저기 어딘가의 보이지도 않는 공간 속으로 흡수되어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사는 곳의 모습은 이렇게 비행기 안에 있을 때에만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나의 시선을 창밖으로 더욱 고정한다.



엔진의 힘으로 공중에 떠 있던 비행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 위에 닿고,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다는 방송이 흐르면, 그 이후부터는 모든 게 속도가 붙는 느낌이다. 비행기에서 내리고 검역대를 지나고, 내국인이라 빠르게 끝나는 입국심사를 마치고 짐을 찾아 입국장의 문을 통과한다.  


2. 출발한 곳과 도착한 곳


다시 인천공항이다.

"공항"의 설렘이나 낭만은 대부분 출국할 때의 이야기인 듯하다. 출국할 때는 공항이라는 장소부터가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두근거림을 준다. 넉넉한 시간에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의 출발과 도착 시간을 알리는 전광판을 확인하고, 꽤 크고 복잡한 공항에서 셀프 체크인 시스템으로 예전보다 벌어진 시간을 누리며 여유를 부리기도 한다. 면세점, 음식점들을 구경하고 탑승 게이트 근처 의자에 앉아 시원한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과 활주로, 대기 중인 비행기를 배경으로 항공권을 들어 인증 사진을 찍는다. 이 사진은 두고두고 보게 되는 종류의 사진은 아니지만, 곧 있으면 떠난다는 자유와 해방감을 안겨준다.



이처럼 떠나던 날에 제 역할을 많이 했기 때문인지, 도착한 날의 이곳은 좀처럼 낭만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방금 도착한 인천공항은 단지 내가 돌아가야 할 곳으로 향하기 위한 경로의 시작일 뿐이다.

자연스럽게 공항철도 타는 곳으로 안내하는 화살표를 따라 지하로 내려가니 때마침 서울로 향하는 일반 열차가 보인다. 그 열차에 올라 창에 비친 우리의 모습을 보았다. 꾀죄죄하고, 피곤해 보인다. 우리 앞에 있는  분들 역시 많이 피곤했던지, 자리에 앉자마자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다. 열차는 약 1시간을 달려 6호선으로 환승할 수 있는 디지털미디어시티역에 도착하고 우리는 이제 막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는 사람들과 섞여 지하철을 탄다. 다행히 러시아워는 피한 것 같지만 퇴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한국으로, 그리고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실감이 든다.


3. 작별


"너무 고생 많았고, 들어가서 푹 쉬어~"

애정이 어린 인사를 나누며 서로를 마주 보고 힘차게 손을 흔드는데 이상하게도 뜬금없이 무언가 아쉽고 슬프다. 우리가 함께한 여행이 이제 정말로 끝났구나.
주책맞게 왜 마음이 이렇게 허전하지. 그 간 시베리아 횡단 열차 기차역에서 보았던 수많은 작별의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아무래도 아직은 여행의 감성에서 깨지 않았나 보다.


그래도 돌아왔다는 사실이 마냥 싫지는 않다.
어제까지는 마지막 날의 아쉬움이 진해져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수십 번 뱉은 것 같은데 막상 집으로 가까워질수록 현실적인 생각들로 머릿속이 채워진다.


흠. 그러고 보니 오늘부터는 잘 곳을 위해 정보를 찾고 예약할 필요가 없구나. 집에 들어가기 전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고 들어가야지. 뭘 먹을까? 김치찌개? 된장찌개? 떡볶이? 몇 가지 음식들을 떠올린 것뿐인데, 입에 침이 고인다. 나와 오랜 시간을 함께 해온 그 익숙한 맛들은 한동안 나와 만나지 못했다는 이유로 평상시보다 몇 배의 감동을 안겨줄 것이다. 식사한 후에는 집에 들어가서 따뜻한 물에 긴 시간 샤워를 해야지. 그리고 침대로 쓰러져 내가 사랑하는 나의 겨울 이불을 덮고 편히 잠을 청해야지.

일상에서는 당연했던 익숙한 공간, 익숙한 음식, 익숙한 시간에 내 몸은 '역시 집이 최고'라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4. 가짜와 진짜


"안녕, 잘 있었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여는 순간에는 항상 저절로 인사가 나온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에게 안부를 묻듯이.

이곳은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자연스럽게 먼지가 조금 쌓인 듯하다. 방문을 열어보니 떠나던 날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던 옷들이 그 자리에서 그대로 나를 맞이한다. 여전하구나, 너희들... 못 본 척하며 시선을 돌리니 책상 위에 자주 쓰는 필기구, 읽다가 만 책들이 쌓여있다.



기분이 이상하다.
뭔가 그대로이긴 한데 오랜만에 만나서인지 나는 지금 "내 방"이라고 적힌 영화 세트장에 들어온 기분이다. 떠나기 전 내가 이곳에서 어떤 옷을 입었고, 어떤 책을 읽었고, 어떤 메모를 했는지 알려주며 다음 씬으로 연결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공간.
가상여행을 마치고 진짜로 돌아왔는데, 왜 이곳이 더 가상공간인 것 같지?


직접 가보진 않았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곳을 가상으로 여행하는 일은 물론 재밌는 순간도 많았지만 조금씩 피곤한 시간도 늘어갔다. 기차를 탈 때마다 러시아 철도 사이트에서 출발, 도착 시각을 확인하며 티켓을 알아보고, 매번 숙소의 위치를 결정하는 것과 가봐야 할 곳들의 경로와 시간을 여러 차례 확인하는 것은 물론, 달이 지날 때마다의 날씨와 옷차림 체크, 방문할 곳의 입장료나 식당의 메뉴 체크 등등 이게 진짜 여행이었다면 몸은 더 피곤했어도 왠지 마음은 더 편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에도 처음부터 진짜 인 게 없었던 이 여행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진짜" 여행과 닮아갔다.

가상여행이니까 무조건 일등석을 고집한 우리의 기차여행은 삼등석으로 자리를 옮겼고, 무엇을 할까 키워드들을 나열하며 횡설수설하던 계획들은 결국 "진짜" 여행과 비슷한 모습으로 정리되었다. 기차에서 보내는 긴 시간 동안 우리는 읽고 싶은 것들을 읽고, 듣고 싶은 것들을 들었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말없이 각자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점점 "진짜"로 다가가던 가상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니 진짜임을 의심하지 않았던 내 공간은 "가짜"의 낯선 냄새를 풍긴다.

기분이 묘하지만, 사실 이 작은 공간이 반드시 "진짜"일 필요는 없다. 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얘기하던 "진짜"의 기준이 무엇인지도 지금은 헷갈리니까. 실체 하는 한 가지를 대상으로도 개개인이 바라보는 "진짜"는 제각각 다르기 마련이다.


5. 여행을 마치며


배낭을 풀어 옷가지들을 세탁기에 넣고, 기념품이 없으면 아쉬울 것 같아 산 작은 마트료시카를 꺼내 책상 한구석에 올려둔다. 동행했던 전자기기들을 꺼내 충전기를 연결하고 책들은 꺼내어 책상 빈자리에 대충 올려둔다.

 


그리고 마지막 숙제 검사를 받는 사람처럼 우리가 작업한 시베리아 황당 열차의 사운드트랙을 틀어놓고 침대로 들어가 그동안의 기록들을 읽어본다.
6월부터 지금의 12월까지 약 6개월 동안 꾸준히 남겨놓은 우리의 기록들은 글이라는 매체가 주는 강력한 단호함으로 우리의 기억과 경험을 고정해 준다. 우리가 글을 쓴 이유는 우리의 음악에 스토리를 담기 위해서였지만 이 기록 속에 남은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은 다른 것들은 금방 사라지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어쩌면 그래서 더 이 만큼의 기억과 경험들이라도 기록으로 붙잡아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BGM으로 깔리는 우리의 사운드트랙은 함께한 여행과 닮아있다. 비가 오는 듯한 바람 소리를 내며 흔들거리던 자작나무, 바다처럼 넓고 신비로웠던 호수, 시간을 거스르며 부지런히 달리던 기차...


언젠가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이 음악을 듣는 날이 오겠지.



우리의 가상여행이 "진짜"와 점점 닮아갔다고 말은 했지만, 우리의 여행에는 기차 안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추억이 없고, 계획되지 않았던 특별한 에피소드가 없고, 우울한 사건이 없고, 음식이나 의사소통으로 고생한 적이 없고, 길을 잃어 힘들어한 적도 없다. 서로 다투거나 싸운 일도 없고 몸이 아파 고생한 적도 없다. 진짜 여행이었다면 어디까지 가능했을까?


부족함과 아쉬움은 많지만, 이번 여행의 아쉬움은 아쉬움대로 남기고 다음 여행으로 이어져야 할 것 같다.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할지 정해진 건 없지만.

이제 막 긴 여행을 마쳤으니 일단은 충분히 쉬고.




방유랑 경음악단의 <시베리아 황당 열차>는 2주에 한 번 업데이트됩니다.

가상여행과 함께 창작된 음악도 함께 올려집니다.

낭독과 사운드트랙은 유튜브와 오디오 클립, 사운드 클라우드(사운드트랙만)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유튜브 낭독: https://youtu.be/qKkLWK5jICk

유튜브 사운드트랙: https://youtu.be/EpR-2fIoGrU

네이버 오디오클립 낭독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2431/clips/28

네이버 오디오클립 사운드트랙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2431/clips/29

사운드클라우드 사운드트랙 https://soundcloud.com/bangyurang/14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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