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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앵 Oct 11. 2022

첫사랑처럼, 피아노가 내게로 왔다

무언가를 평생 사랑한다는 건

                       

 초등학교 시절, 나에게 가장 즐거운 때는 친구에게 생일 초대를 받는 날이었다. 우리 반 부반장이었던 화미라는 친구의 생일날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어딘지 모르게 또래 아이들보다 어른스럽고 다정한 스타일의 화미는 나의 절친이었다. 생일파티가 있던 날, 친구들과 우르르 그 애의 집으로 갔을 때 화사한 앞치마를 두른 화미 엄마는 아이들을 모두 방으로 데려가 깜짝 생일 선물을 공개했다. 그건 수십 권의 어린이용 문학전집이었다. 파티가 끝나고 친구들은 밖에 놀러 나갔지만 난 시선을 끌었던 친구 방 안 피아노 앞에 서 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피아노의 뚜껑은 열려 있었고 건반 위로 빨간 천이 레드카펫처럼 덮여 있었다. 까맣고 커다란 본체와 대조되는 빨간색에 시선이 꽂힌 난 거의 압도되어 있었다.     



 정지된 화면처럼 피아노 앞에 서 있는 내 모습을 본 화미 엄마가 말씀하셨다. “윤경아, 한번 쳐볼래?” 난 거의 자동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빨간 카펫이 들춰지자 까만 건반을 품은 새하얀 건반이 모습을 드러냈다. 피아노를 쳐 본 적이 없던 난 설레는 마음으로 맨 왼쪽부터 오른쪽 끝까지 단 하나도 빼놓지 않고 하나씩 건반을 눌러보았다. 아주 조심스럽게. 아직 아무도 걷지 않은 드넓은 설원에 발자국을 내며 걷는 기분이었다. 미끄러질 듯 매끄러운 건반이었지만 꾹꾹 누를 때마다 어느 정도의 묵직함이 손끝으로 느껴졌고, 다른 사람이 치는 소리를 들을 때와 달리 내가 만들어내는 그 단음의 소리들은 온몸을 통과해 밖으로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음악은 아니지만 내겐 천상의 소리였던 그 음들이 여든여덟 번 울릴 때까지 화미 엄마는 내 모습을 미소 띤 얼굴로 그저 지켜보고 계셨다. 그날의 어린 난 새로운 무언가에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겼다. 친구의 책꽂이를 가득 채운 문학전집도 부러웠지만, 피아노만큼 강렬하지는 않았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진 건 잊지 못할 ‘피아노 터치’의 경험을 한 후 4년이 흐른 뒤였다.     


 피아노를 그만둔 후 20년도 훨씬 지났을 무렵, 난 아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시던 홍은영 선생님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홍 선생님은 실력도 좋고 음악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분이었다. 레슨 받는 시간보다 함께 음악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더 길 때가 종종 있을 정도로 코드가 잘 맞기도 했다. 어느 날, 어린 시절 피아노에 마음을 빼앗긴 경험과 그 이후 피아노를 배우게 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엄마를 졸라 6학년 때 피아노 학원에 다니기 시작하고 그 이후 딱 3년간 피아노를 배우다 넉넉지 못한 형편으로 그만두었어요. 지금도 그게 마음에 맺혀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도 피아노를 치시는 거예요. 전공하고도 피아노 뚜껑도 안 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아, 그런가요?”

 “그럼요, 전공 여부를 떠나서 지우 어머니처럼 음악을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그저 지금 같은 마음으로 피아노를 즐기셨으면 좋겠어요.”     


 선생님의 그 말은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무엇보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게 고마웠고 지나간 것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지금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전업주부로서 두 아이를 키우고 살림하면서 피아노를 계속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개인지도를 못 받을 때도 선생님 말대로 마음 편히 즐기면서 피아노를 칠 수 있었다, 피아노를 치고 피아노 음악을 듣는 건 어쩌면 기나긴 육아의 터널을 지나면서 나를 지탱해 준 가장 큰 힘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서인지 여유를 가지고 피아노를 칠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나는 아마추어이지만 ‘잘’ 치고 싶어 오늘도 연습을 한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지만, 언제가 되었든 어떤 형식으로든 음악을 ‘정식으로’ 배우고 싶다는 꿈도 꾸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의 어느 날 우연히 마주쳤던 피아노에 매료되었던 그 마음은 아직 그대로이며 나의 ‘피아노 홀릭’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제주지앵의 음악 용어 T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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