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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차 출근 - 요염하고 귀여운 10,000원

"10,000원이 남았어요!"

"다시 ATM기계부터 전부 회수하고 세."


 안녕하십니까, 형님들!

 즐거운 오후 5시, 배에서는 꼬르륵 거리는 배고픈 시간입니다! 그런데 저희 지점의 시재(현금 전체)는 10,000원이... 남았네요! 마음 같아서는 오늘 아침부터 일한 제 자신의 눈동자와 손가락에게 다시 묻고 싶습니다. 어떤 고객님께 돈을 덜 준 건가! 다시 몇 억의 현금 뭉치를 드르륵 계수기를 돌리며 세면서, 퇴근이란 단어를 잊기 시작합니다. 이거 다 하나하나 풀어서 샌다면 이제 한 시간은 퇴근이 늦어지겠네요. 얼굴은 뜨거워지고 머리는 하얘지고 등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히네요, 이미 범인은 너다! 하면서 보고 있는 선배님들의 시어머니같은 눈초리에 머리카락은 한 만 개 정도 남아나지 않고 빠지는 느낌입니다.

  

 아니, 형님들, 이 세종대왕 한 장, 도대체 어디서 배시시 미소를 머금고 나타난 것일까요? ATM기계가 한 장을 덜 셌나? 아니면 고객님들과 수다를 떨다가 한 장 떨어져 있었나? 아니면 제 지갑에서 심심한데 친구들이랑 놀아볼까 하면서 현금통에 뛰어든 친구인가?


 근데 형님들, 갑자기 딴 생각을 한다면, 이 10,000원이라는 게 어떻게 보면 저를 냉탕과 온탕을 빠트리는 요염한 친구라고 봐요. 일단 예금 고객님들에게 드리는 현금에서 10,000원이 틀리면... 저희 지점은 마감하기 전까지 단 돈 1원이라도 틀리면 저는 감자전으로 으깨져서 부쳐질 인생이죠. 어마어마하게 제 목숨줄이 걸린 돈입니다. 또한 어느 예금 고객님께서 10,000원이 없으셔서 식사도 못 하시면 어떻게 하나요? 그럼 이제 즐거운 민원 라이프를 느끼겠죠. 저같은 감자에게나 어떤 고객님들에게는 정말로 큰 돈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대출 상담을 하다보면, 몇천만원, 몇 억원을 기계에서 뚝딱! 실행하여 통장에 입금을 하는 걸 보아 10,000원 정도는 작고 귀여운 단위이지 않나 느껴 봅니다. 또한 금고에 있는 수 억의 신사임당 선생님들 뭉칫돈을 영접하면, 몇 억의 시재에 비해 10,000원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닌가요?


 그런데 이런 불순한 사상을 가지고 일을 하다 보니 가면 갈수록 돈에 대한 감각이 둔해지고 있습니다. 적어도 위인 세종대왕님 정도면 애송이를 보는 듯한 느낌, 그리고 제 돈이 아니라 그저 종이 한 장이라고 느끼고 있네요. 근데 형님들, 문제는 제 월급도 작고 귀엽고 소중하고 소소한데, 제 월급을, 그렇게 느끼면서 하찮게 지출을 하고 있더라고요! 매일 머리통 으깨질 각오로 전분을 섞어 가며 일하는데 무슨 매일 소소하게 쇼핑몰에서 결제하고, 소소하게 카페에서 고오급 커피 먹고, 소소하게 학원비 긁고, 소소하게 오마카세 가고, 소소하게 해외 왕복 비행기 값 내고.... 티끌같은 세종대왕님이 모였더니 태산같은 카드값과 마이너스 통장의 숫자가 남아 있더라고요.


 예금 고객님들 중에는 몇 군데 금융기관 돌아다니시고, 어플 깔아 우대금리 받고, 세금우대 항목 및 종합소득세 다 짚으시면서 보니, 현금성 자산만 몇 십억 찍힌 분들을 보았습니다. 하나같이 작은 돈에서 아껴서 태산을 만드신 분들이더라고요. 대출 고객님들 중에서도 가끔씩 거래 내역 다 뽑고 하나하나 형광펜 칠하면서 따지시는 분들이 대체로 큰 부동산 자산으로 레버리지를 하시는 분들이었습니다. 형님들, 이게 제 목표에요.


 그러나 현실은 10,000원부터 찾아야 하는데, 이제부터라도 제 월급의 작은 친구들부터 시재를 맞추겠습니다. 그래서 저를 오프라인으로 아시는 형님들은 이제 저한테 무엇을 사 달라 감 내놔라 배 내놔라 위인 내놔라 안 하길 바랍니다. 매일 시재 검사하고 집에 안 갈 거에요. 제 월급 다 맞을 때까지 말입니다. 서점에 들려서 각종 가계부 책들을 보면, 공통적으로 먼저 기록하라고 써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간편하게 메모장으로 오늘 지출 내역을 쭉 편하게 내용과 금액을 적기 시작했어요.


 아침 커피 1500원 점심 식당 7000원 저녁 샐러드구독 6500원 분노의 제로콜라 1+1 2000원 양말쇼핑 20000원


 일단 시재를 맞추겠습니다. 커피는 이제부터 혼자 먹을거면 사무실가서 비품을 사용하도록 해요. 분노의 제로콜라는 왜 먹은 걸까요? 금고 시재가 안 맞아서? 내 곳간이 비는데? 양말은 무슨 색깔별로 샀는데 어차피 출근할 때는 그거 안 신을 꺼잖아? 이렇게 자아비판을 하고 내일부터는 예산을 정하고 쓰는 습관을 길러야겠습니다.


 아, 형님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남은 10,000원은 어디 있었냐고요? 제가 고객님 통장을 바꿔드리고 입금을 안 했더라고요. 이제 선배님들이 감자칼과 채칼을 들고 오십니다. 계수기 드르륵 하듯이 이제 반자동 슬라이스 되겠네요. 다시 돈의 감각을 금고에서도 월급에서도 살리고 오겠습니다. 형님들, 그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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