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추진해 봤자 안 될 일을 추진하는 것에 대한 회의감에 쩔어 있다가, 점심에 쌀국수 먹고, 할 일이 없으니 몇 안 되는 업무에 시간을 쏟아부었다. 옷 만들던 사람이 단추 광내고 있는 수준이다.
업체에 보낼 메일을 몇 번이고 퇴고한다. 맞춤법 검사기까지 돌린다. 이래도 시간이 안 가. 사람이 머리를 적당히 써야 일정 수준 이상의 지력이 유지되는데 내 지력은 지금 초선에게 홀린 여포와 비슷하다.
기획안을 열심히 썼던 때가 있었다. 입사 후, 경력직 시니어로서 뭔가 보여줘야 한다라는 압박감에 기계처럼 기획안을 썼다. 이런 거 해보면 어떨까요, 이런 것도 도입하면 좋겠어요. 타 기업에서는~~~ 블라블라블라.
몇 가지 기획안은 채택되어 추진되기도 했다. 그뿐이다. 한 해를 회고하는 상사와의 면담에서, 내 앞에 '실패'라는 단어가 낙석처럼 쿵 떨어졌다. 000 님 그렇게 하면 안 돼, 그럼 계속 게임에서 져요. 좀 더 political하게 해야지.
내가 사내에서 딱 두 사람한테 털어놓은 속내가 있는데, 나의 상사는 그걸 알고 있었다. 입조심 못한다는 소리까지 듣고 나니 지나가다 빠따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뇌수가 줄줄 새는 기분. 제가 그런 런 말을 한 건 맞지만... 실언을 했네요, 제가. 저는 정치적인 사람은 아니라서...
왜 나의 기획안이 buying 안 되는지에 대해서 (조사만 빼고 영어를 쓰는 이상한 문화가 있다 이건 또 무슨 신종 개저씨 문화인지) 내가 이 조직을 너무 몰라서,라는 피드백을 받았다. 나도 저 개저씨들처럼 고인 물 돼야 이 조직 속속들이 알 것 같은데. 언제까지 과거를 여행해야 하는 걸까. 내가 이 조직을 모르는 게 아니라 과거를 모르는 거잖아. 과거 = 이 조직인가? 열리지도 않는 2015년 파일은 왜 자꾸 공유해 주는 건데!?
아파트 앞 낡은 상가에 정말 아무도 안 살 것 같은 모자를 어제고 오늘이고 내일이고 매일같이 만드는 사장님이 있다. 중꺾그마란 이런 것일까. 중요한 건 꺾여도 그냥 하는 마음. 나는 팔리는 아이디어를 내고 싶은데. 내가 만든 기획안도 사장님의 모자처럼 남들이 볼 땐 저걸 누가 buying 해.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내 기획안은 언제쯤 buying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