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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기요 Sep 25. 2019

나의 영원한 안티팬

독립, 연애, 결혼, 육아만큼이나 내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건 '엄마'다. 부모에게 휘둘리고 부모의 평가에 민감한 사람은 배우자로서 최악인데, 내가 딱 거기에 해당한다. 내 인생은 엄마에게 지배당하고 있다. 내 삶의 추는 엄마에 따라 움직인다.


자비에 돌란의 데뷔작 <아이 킬드 마이 마더>를 보고 프랑스 문화권의 위대함을 깨달았다(프랑스 사람인 줄 알았는데 퀘백 출신이라고...). 내가 엄마에게 느끼는 설명하기 어려운 오묘한 감정이 그 영화에 너무 잘 담겨 있었다. 불어를 쓰면 이런 예술적 감성과 표현력을 갖게 되는 걸까? 경탄에 가까운 감상을 느꼈다. 때론 너무 싫고 밥 먹는 모습만 봐도 짜증나는데, 날 공감해줄 사람은 세상에 엄마뿐이고, 나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도 엄마뿐이고, 궁지에 몰렸을 때 내미는 다급한 손을 내치지 않을 사람도 엄마뿐이다. 나를 지긋지긋하게 사랑하고 나를 지겹도록 미워하는 사람. 엄마, 엄마, 엄마. 나는 엄마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엄마는 나의 영원한 안티팬이다.


엄마와 사이가 좋을 땐 이렇게 죽이 잘 맞는 모녀가 없다. 비빔국수 한 그릇 땡길 때 같이 먹으러 갈 수 있는 사람, 내 체형을 가장 정확히 알고 있어서 함께 쇼핑하면 절대 후회 안 할 아이템을 추천해주는 사람, 나처럼 집 보러 다니는 게 취미인 사람. 엄마랑 함께 놀면 편하고 재밌다.


내가 엄마의 심기를 건드렸을 땐? 지구 종말의 날이 펼쳐진다. 나는 엄마에게 맹렬하게 비난당하고, 깐깐하게 평가받고, 억울해서 악을 쓰며 대들다가, 눈물이 범벅된 채로 다시 엄마 눈치를 살핀다. 나는 엄마를 벗어날 수가 없다.

영화 <레이디 버드>의 한 장면.  미국의 모녀 관계도 별반 다르지 않구나 싶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엄마의 평가에 굉장히 민감했다. 36년을 중학교 국사 선생님으로 살아오신 엄마께 평가는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평가는 긍정적 뉘앙스보다 부정적 뉘앙스가 강하다. 누가 뭘 잘하고 못했는지를 주관적인 잣대로 판가름하는 게 평가다. 나는 엄마의 평가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담임 선생님이나 친구나 좋아하는 이성의 평가보다도 엄마의 평가가 가장 중요했다. 엄마에게 예쁘단 소리를 듣는 것, 좋은 성적을 받아서 엄마에게 인정받는 것, 엄마 맘에 드는 사람을 배우자로 고르는 것 등이 나에겐 통과하기 힘든 과제였다.


자기 밥벌이는 스스로 해야 하며, 잘 관리된 몸을 유지할 것, 게으름과 나태함과는 멀어질 것. 책임감 강한 사람이 될 것, 교양 없는 사람으로 보이지 말 것, 술 마시지 말 것...술만 제외하고 내가 싫어하는 것들, 내가 두려워하는 것들에 대한 가치관은 모두 엄마가 심어준 것이다(술은 너무 강조해서 오히려 엇나간 케이스다. 오늘도 육퇴 후 한 잔만을 기다린다).


20대 때는 엄마의 정서적 통제 때문에 엄청나게 괴로웠다. 왜 뭘 할 때마다 엄마 얼굴이 어른거리는지 정신과 상담을 받고 싶을 정도였다. 30대가 되어 독립을 하며 엄마와의 관계가 어느 정도 대등해졌다. 멀리 사니 부딪힐 일이 없었고, 딸의 독립을 엄마가 어느 정도 인정하고 받아들이셨기 때문이다.


결혼, 임신, 출산을 겪고 육아라는 새로운 세계에 뛰어든 지금은? 육아 파트너 1호가 남편이라면 엄마는 0호다. 육아에 관련된 모든 것은 엄마와 상의한다. 엄마는 나의 다산콜센터요, 네이버 지식인이며, 맘카페에 올라오는 모든 글을 합친 것보다 더 현명하고 신속한 답변을 준다. 엄마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다. 엄마는 신이다.


나의 육아 일상은 엄마의 심기를 살피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기를 맡기고 출근하다 보니 엄마의 건강, 엄마의 감정 상태가 정말 중요하다. 회사에서 나오는 명절 상품권 20만 원 다 드린다고 했다가, 10만 원은 시댁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양해를 구했더니 엄마가 내심 삐치셨다. 육아에 비상이 걸렸다. 애초에 10만 원만 드린다고 할 걸...뼈저리게 후회했다.


오늘도 퇴근하며 엄마 눈치를 살폈다. 엄마, 제 자식 키워주시느라 고생 많으세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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