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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기요 Jan 30. 2020

난 행복해

남편이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나(<82년생 김지영> 같은) 여성과 관련된 사회적 이슈에 감정이입을 잘 못 한다고 느낄 때가 많다. 사소한 것 같지만 이런 기분을 자주 느낀다. 내가 영화 <친구>를 끝까지 못 보는 것과 비슷한 심리일까? 여자가, 여자들이, 그래서 뭐?라는 반응을 마주할 때면 가슴이 조금 답답해진다.


여자라서가 아니라 그냥 같은 인간으로서 불합리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경우가 좀 더 많음을 인정하고 이해해 주면 안 될까? <일과 육아>라는 거대한 파이를 매일매일 꾸역꾸역 먹어치우면서 때때로 솟구치는 설움을 어디에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 왜? 내가? 나만? 하루에도 열두 번씩 이런 감정과 싸운다. 미친 사람처럼 혼잣말을 하거나 차오르는 눈물을 삼킬 때가 많다.


"엄마는 원래 힘든 거야." 친정 엄마 말씀에 찬밥을 두 덩이 삼킨 기분이었다. 엄마는 원래 힘든 거니까, 참고 견디는 게 현명한 걸까? 그게 좋은 엄마가 되는 길이니까? 세상은 왜 당연한 듯 엄마에게 더 무거운 짐을 턱 하고 내맡기는 걸까. 좋은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무언의 강요와 협박도 함께.


시차출퇴근제가 도입돼 8시 반 출근 - 5시 반 퇴근을 택했다. 일찍 출근해야 일찍 퇴근해서 아이를 빨리 찾을 수 있으니까. 새벽 4시부터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6시면 눈이 떠진다. 대충 씻고 애기 옷과 밥 챙기고 화장은 하는 둥 마는 둥 시리얼에 토스트로 아침 먹고 7시 반에 엄마가 와주시면 그때 출근을 한다. 이른 아침부터 장모님이 들이닥친다는 인상을 줄까 봐 남편 눈치도 봐야 한다.


퇴근 시간엔 조바심이 극에 달한다. 5시 29분에 PC 끄고 30분에 비상구 계단을 통해 9층에서 2층까지 내려간 뒤 지하철과 연결된 건물 에스컬레이터로 향한다(우리 사무실은 백화점 건물에 있다). 5시 36분 차를 타야 약속한 시간에 아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무조건 6분 안에 지하철 개찰구를 통과해야 한다.


예전엔 에스컬레이터를 계단처럼 이용하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됐다. 요즘 내가 그렇다. 한가로이 쇼핑하러 온 사람들의 멈춰 선 발이 나를 초조하게 만든다. "죄송합니다!"를 외치며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에스컬레이터를 뛰어 내려온다.


6시 10분에 역에서 아이를 받고 아빠 차로 집까지 이동해 엄마와 함께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올라온다. 내가 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할 때까지 엄마가 아이를 봐주신다. 아빠가 차에서 엄마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에 맘이 급하다. 엄마 배웅하고 애기 맘마 먹이고 옷 갈아입히고 바닥 닦고 내일 출근할 때 입을 옷 꺼내놓고 응가 치우고 엉덩이 씻기고 기저귀 갈고 로션 발라주고 남편 저녁 차려놓고 나면 녹초가 된다.


퇴근한 남편을 현관에서 맞이하며 방긋 웃는 아내가 되고 싶은데 내 얼굴은 늘 죽상이다. 힘듦에 힘듦이 계속되니 표정 관리가 안 된다. 남편이 간혹 아이를 돌보며 한숨을 쉬거나 내가 하는 집안일이 마음에 안 든다는 투로 얘기하면 그 순간 강하게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남편이 그렇게까지 원망과 비난을 받을 만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그 순간 강한 울분과 좌절감에 휩싸인다. 부모의 지적에 욱하는 사춘기 중학생 같다.


"행복하지 않아?"라는 남편의 물음에 입꼬리를 조금 당겨 올릴 기운조차 없었다.

나는 행복해. 진짜야.

그런데 때때로 정말 사라지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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