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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기요 Jan 17. 2020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주말에 넷플릭스 영화 <프라이빗 라이프>를 봤다. 뉴욕에 사는 40대 중후반 부부의 현실적인 난임 치료 이야기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눈을 뗄 수 없었다. 사는 곳도 연령도 처한 상황도 다르지만 부부의 이야기에 매우 공감이 갔다.

영화 <프라이빗 라이프>

임신과 출산은 왜 오롯이 여자의 몫일까. 난임 치료를 위해 수십 번씩 남자 의사 앞에서 다리를 벌리는 여주인공을 보며 마음이 쓰라렸다. 산부인과는 가도 가도 적응되는 곳이 아니다. 임신 기간 동안 2~4주에 한 번씩 병원을 가면서도 도무지 적응이 안 됐었다.


일명 굴욕의자에 앉을 때마다 '조금만 참자'라고 주문을 외웠다. 다리 사이로 차가운 스뎅컵(...) 같은 게 들어올 땐 소름이 쭉 끼쳤다. 나의 가장 소중하고 은밀한 곳에 차가운 스뎅컵이 쑥 꽂히다니... 불편하고 치욕스럽고 너무너무 싫었다.


계획 임신을 준비할 때, 산전 피검사를 통해 내 몸에 있지만 실체는 잘 모르는 난소의 나이를 알았다. 생물학적 나이보다 10살 정도 어리다고 했다. 검사 결과를 듣고 대학에 합격했을 때만큼 기뻤다.


고령 산모라는 말에 누구보다 민감했고, "나영 님 나이에 임신한 건 기적"이라는 직장 동료의 발언에 "내가 할머니도 아니고 뭐요? 진짜 무례하시네요"라고 응수하고 싶기도 했다(현실은 "그러게요^^" 였지만). 결혼 전 "서른넷의 여자는 김태희 아니면 결혼 힘들다"는 친오빠의 진지한 농담에 연을 끊을까 잠시 고민하기도 했었다(레알 일촌이라 참았다). "결혼이 늦어 아이는 하나 밖에 못 낳겠네"라는 막내삼촌의 말에 차려입고 간 가족 모임에서 자리를 박차고 나오고 싶은 적도 있었다(저 암소 아니고 사람이에요...). 나이를 잣대로 여성을 평가하는 사람들은 나에게 물리쳐야 할 적이자 혐오의 대상이었다.


이런 내가 난소 나이가 어리다는 말에 희열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다니. 나의 난소는 나이에 연연하지 말자는 나의 가치관과는 상관이 없었다. 난소 나이가 어릴수록 임신 가능성이 높은 건 과학적 사실이었다. "동안이시네요"라는 말보다 "난소 나이가 어리시네요"라는 말이 백만 배는 더 듣기 좋았다. 자연 임신이 안 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니 노력만 하시면 된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피말렸던 임신과 출산 경험을 통해 임신과 출산이 여자에게 얼마나 가혹한 일이며,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임신과 출산은 오로지 우리 부부만의 일이었다. 타인의 임신과 출산에 대해 제3자가 감히 코멘트할 자격은? 없다.


두 번째 출산은 하고 싶지 않다는 글에 "그래도 낳게 될 걸요" 같은 뉘앙스의 댓글이 달렸다. 확신에 찬 어조가 신기하고 한편으론 의아했다. 생판 모르는 남이 자신 있게 의견을 낼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사회는 여전히 임신과 출산에 대해 오지랖을 허용하고 있는 건 아닐까.


포스터도 좋다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제목을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신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다. 임신 계획 없냐는 질문, 안 생기는 건지 안 낳기로 한 건지라는 질문, 둘째는 왜 안 갖냐는 질문은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해도 사생활 침해다. 생각은 자유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내놓는 순간 타인의 사생활에 함부로 관여하고 판단하는 게 된다.


영화를 보며 건강한 난자를 얻기 위해 호르몬을 투약하고 술과 담배는 당연히 멀리하며 섹스도 못하는 20대 난자 기증자는 얼마나 힘들까 싶고, 타인의 난자와 남편의 정자를 수정시켜서라도 아이를 갖고 싶은 부인의 심경은 절절하게 와 닿고, 그런 아내의 힘듦을 지켜보며 아내의 감정을 공기처럼 느끼는 남편의 입장도 참 딱했다.


임신을 원할 땐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다. 말로는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아!"라고 했지만 그건 진심이 아니었다. 나의 임신 강박증을 곁에서 고스란히 지켜본 엄마가 그러셨다. 넌 지금 애 갖고 싶어서 환장한 여자 같다고. 맞다. 아이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나는 미쳤을지도 모른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조바심 나고 간절해서 미쳐버릴 것 같은 감정. 그런 감정을 속으로 삭히는 사람들이 주변에 없을 리 없다. 자신들의 임신 증상을 종일 말하며 내 속을 바짝 마르게 했던 직장 동료들. 35살 넘으면 아이에게도 엄마에게도 좋지 않다며 하루라도 빨리 임신하라고 조언했던 지인들. 제왕절개보다 자연분만이 훨씬 좋으니 무조건 자연분만 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어른들. 둘은 낳아야 하지 않냐며 형제 없는 아이는 외롭다고 말해준 사람들. 악의는 1도 없었겠지만 사생활을 침범한 주범들이다.


임신과 출산을 겪었다고 해서 타인의 임신과 출산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기는 건 아니다. 타인의 프라이빗한 영역에 대해 함부로 왈가왈부하지 말자. 스스로도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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