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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기요 Aug 03. 2019

나는 그렇게 당근마켓에 빠졌다

육아 휴직 기간 육아를 제외한 내 일상의 팔 할은 중고 물건을 사고파는 당근마켓이었다. 어느 날 페이스북에 광고가 떴고, 동네 기반 직거래 앱이라는 게 신기해서 호기심에 깔아봤다. 나에겐 눈 앞에서 당장 치워버리고 싶은 수유복과 수유 나시가 있었다. 수유복은 가슴에 가로로 지퍼가 달려서 어디서든 지퍼를 쫙 열고 수유할 수 있게 만든 옷인데, 디자인이 진짜 흉했다. 수유 기간 내내 잘 입었지만 하루빨리 보내주고 싶었다.


왜 하필 파라다이스...


임신과 출산을 떠올리게 만드는 물건은 모두 없애버리자! 물건을 없애면 왠지 두 번째 임신의 가능성도 사라질 거라는 미신 같은 믿음도 있었다. 대부분 선물 받거나 지인들에게 물려받은 거라, 버리긴 좀 그렇고 필요한 사람에게 저렴한 가격에 넘기면 상부상조겠구나 싶었다. 나는 그렇게 당근마켓에 입성했다.


이용 방법은 정말 간단했다. 나처럼 스마트폰 사용에 서투르고 뭐든 처음 시작할 때 엄청 버벅거리는 사람도 단 몇 분 만에 판매 글을 올릴 수 있었다. 사용자 친화적으로 정말 잘 만든 앱이었다. 첫 판매 글은 정보만 딱딱하게 써서 올렸는데, 몇 번 올리다 보니 어라라? 이거 꽤 재미가 있었다. 중고 판매 글은 새로운 글쓰기의 영역이었다.


짧은 몇 줄에 물건의 사연을 녹여내는 게 참 흥미로웠다. 사이즈/가격/직거래 방법만 올리는 것보다, 나 같은 아줌마들이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끔 친절하고 매력적으로 상품을 소개하는 게 관건이었다. 다른 판매자들의 글도 많이 참고했다. ‘사놓고 안 입어서 팔아요’ 보다 ‘아끼던 물건인데 내놓아요’라는 문구에 더 끌렸다. 산 값의 1/10 정도로 아주 싸게 내놓아야만 관심의 표시인 ‘하트’ 수가 올라간다는 것도 알게 됐다.


처음엔 진짜 필요 없는 물건만 올렸는데, 나중엔 옷장과 신발장을 뒤져가며 팔 거리를 찾고 있었다. 일을 쉬는 동안 안 쓰는 물건을 싹 정리하면 내 삶이 조금이나마 심플해질 것 같았다. 과거에 산 옷과 신발은 지난 연애의 흑역사 수준으로 참담했다. 20대의 나는 돈도 없고 취향도 꽝이었다. 30대 초반의 나는 취향은 별반 나아진 게 없는데 구매력이 좀 생겨서 쓰레기 같은 걸 참 많이도 사들였었다. 양자역학으로 과거 여행을 할 수 있다면 제발 사지 말라고 만류하고 싶은 것 투성이었다.


10센티짜리 가보시힐 이런 건 대체 왜 샀니... 왕 리본 달린 분홍색 운동화는 또 뭐니. 옷도 마찬가지였다. 친오빠 상견례 때 1번 입고 모셔둔 55 사이즈 원피스는 입고 나서 꿰매지 않는 한 도저히 들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 왜 백화점에서 비싼 돈 주고 산 원피스들은 하나같이 스판기 전혀 없고 1킬로만 쪄도 들어가지 않게 디자인돼 있을까.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가고 등에 긴 지퍼가 달린 원피스와는 모두 안녕이었다.


이때쯤 넷플릭스에서 <곤도 마리에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를 본 것도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설렘을 기준으로 버릴 건 버리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아담한 일본 아줌마에게 나는 완전히 압도당했다. 내 옷장과 신발장엔 설렘이라곤 없었다. 어차피 버려야 하는 것들이니 당근마켓에 올려서 단 몇 천 원이라도 벌면 남는 장사였다. 나는 신이 나서 하루에도 몇 개씩 판매 글을 올리고 직거래를 했다.


당근마켓은 루틴한 육아 일상에 소소한 자극과 즐거움이었다. “당근~" 하는 경쾌한 알람이 울리면 생판 모르는 사람과 채팅으로 직거래 약속을 잡았다. 천 원만 깎아달라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던 사람은 막상 만나 보니 이렇게 세련될 수 없는 아줌마였다. 인사도 없이 가격 흥정부터 하던 '아들셋맘'은 인자한 미소에 친절함까지 갖춘 분이었다. 아이들을 키우며 액세서리와 멀어졌다가 요즘 다시 모으는 재미가 생겼다며 활짝 웃던 아주머니도 기억에 남는다. 내 추억이 담긴 물건들은 그렇게 하나둘씩 좋은 주인을 찾아 떠났다.


육아휴직 기간 동안 80여 개의 물건을 판매했다. 제법 괜찮은 용돈벌이 수단이었다. 휴직 기간 월급이 안 나와서 우울했는데, 당근마켓 덕분에 약간의 수입이 생겨서 좋았다. 판매가 좀 잦아든 뒤엔 다른 판매글 보는 재미에 빠져서 매일매일 수십 개의 글을 정독했다. 이제는 후회만 남은 타인의 취향과 소비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유행 지난 명품백을 열몇 개씩 올리는 사람도 있고, 결혼기념일에 남편에게 선물한 비싼 시계를 올리는 사람도 있고, 이민 준비로 가전과 가구까지 한아름 내놓은 사람도 있었다. 판매 글을 보며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하고 상상해 보기도 했다.


중독 수준으로 빠졌다가 복직 후에는 육아용품을 싸게 구매하는 용도 위주로 여전히 잘 쓰고 있다.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인 출산 휴가와 육아휴직 기간은 당근마켓으로 기억될 것 같다. 나에게 소소한 재미와 용돈벌이의 추억을 안겨준 당근마켓. 정말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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