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행복주워담기 Sep 29. 2022

사춘기 딸 너 때문이 아니고, 네 덕분에

밤 12시, 딸을 데리고 20년 만에 PC방을 방문했다.

 우리 딸만 그런 걸까? 아니면 사춘기 요맘때 아이들은 다 그런 걸까? 할 일을 마치고 즐겨야 휴식다운 휴식일 텐데 우리 아이들은 휴식은 휴식대로 즐기고 그러다 보면 늘 할 일이 늦어진다.



 "엄마, 저 8시에 깨워주세요. 스터디 카페 갈 거예요."

 일요일 이른 아침, 두 딸이 스터디 카페로 향했다. 큰 아이는 중간고사 공부를, 작은 아이는 학원 과제와 곧 있을 학원 테스트 공부를 한다며 스터디 카페에서 4시간 집중 공부를 하고 오겠다고 했다. 등 떠밀어서 하는 공부가 아니라 스스로 하는 공부이기에 딸들의 그런 모습이 기특하긴 했다. 그리고 4시간 후, 두 녀석이 다이소에 갔다가 코인 노래방에 잠시 들렀다 오겠다고 했다. 물론 허락했다. 쇼핑도, 노래도 할 공부를 다 하고 난 후 하겠다고 하니 뭐라고 하겠는가? 정확히 40분 정도 후에 두 녀석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온 듯 상기된 얼굴로 돌아왔고, 난 부지런히 점심을 차려줬다. 점심을 먹은 후 아이들은 남편과 셋이 모바일 게임을 한참 즐겼다. 주중에는 학교 다니느라, 학원 가랴 게임을 거의 하지 않는 아이들이라 게임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터치를 해본 적이 없다. 다른 집 아이들처럼 심각하게 오래 게임에 몰두해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각자 방에 흩어져서 휴대폰으로 유튜브도 보고, 오후 시간을 내내 여유롭게 보내는 아이들은 일주일치의 피로를 휴대폰에 묻어 넣는 것 같았다. 

 저녁을 먹으며 딸들에게 오늘 계획한 것들을 다 마쳤냐고 물으니 아직이라고 했다. 어제 커피를 마셔서 늦게 잠든 탓에 오늘은 아무래도 초저녁 잠이 들 것 같았던 나는 아이들에게 식사 후 얼른 할 일을 마치고 잘 준비를 하라고 했다. 오후에 좀 해뒀으면 좋지 않았겠냐고 했으나 두 딸은 들은 척 만 척이었다.

 


 "엄마아~!"

 10시가 넘은 시간, 두 녀석이 노트북을 가지고 서로 쓰겠다며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큰 아이는 수행평가 자료를 준비 중이었고, 둘째는 영어 학원 과제로 딱 5분만 쓰면 된다며 잠시 비켜달라고 했다. 그렇게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큰 아이가 일찍 마치지 못할 것을 예감하고 둘째에게 빨리 하라며 잠시 자리를 비켜줬다. 쿵쾅쿵쾅 걸음마다 불만을 표시하며 문을 쾅! 닫고 녹음 숙제를 하는 둘째. 그런 아이들을 보면서 큰 소리를 내고 싶었으나 꾸욱 참았다. 과제를 마친 둘째는 바로 잘 준비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고, 그 시간 큰 아이는 프린트를 해야 한다며 나에게 SOS를 보내왔다. 


하지만 우리 집 프린터기는 언젠가부터 컬러 인쇄가 되지 않았다. 잉크는 분명 남아 있는데 컬러 인쇄를 누르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뭔가 원인이 있었겠으나 솔직히 나는 컬러 인쇄는 쓸 일이 없었기에 그냥 방치해두고 있었는데 내일 수행평가 자료사진이 컬러로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늘 미리 좀 해두라는 거잖아."

 나의 말에 큰 아이는 

 "엄마! 내가 과제를 안 한 것도 아니고, 하루 종일 논 것도 아니고, 오전 내내 공부했잖아. 나도 좀 쉬어야지!"

 라고 반문을 했다. 

 '쉬는 것도 해야 할 일을 다 마쳐 놓고 쉬어야 하는 것 아니냐. 오후 내내 휴대폰만 보다가 이 늦은 시간에 이러고 있는 게 잘한 거냐.'

 속으로는 따박따박 따져보고 싶었으나 그래 봤자 서로 마음만 상할 것 같아서 심호흡 한 번에 하고 싶은 말들을 삼켜버렸다. 그리고 프린터 상태가 이렇다는 것을 알면서 방치한 내 잘못도 있었다.

 시계는 12시가 다 되어 가는데 기계치인 내가 계속 컴퓨터와 사투를 벌이며 출력을 시도하는 건 무리였다. 

스터디 카페를 가서 출력을 해와야 하나, 친구에게 부탁을 해야 하나, PC방에 가야 하나, 아이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고, 프린터에 두 손을 든 나는 결국 PC방에 가서 인쇄하는 것을 제안했다.

 


 어두컴컴한 길을 딸아이와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20년이 넘게 한 동네에 살고 있지만 지금까지 이 동네에 PC방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볼 일이 전혀 없었다. 중학생인 딸도 PC게임은 해본 적이 없으니 PC방 출입이 처음인 건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밤길을 걸어 집에서 제일 가까운 PC방에 도착했다. 그런데 입구에 떡하니 

'청소년 출입 가능 시간 밤 10시까지'라고 적혀 있는 게 아니겠는가? 그 글 앞에 딸아이는 살짝 망설였으나 무적의 아줌마 정신으로 인쇄만 할 것이고 보호자인 나도 있으니 괜찮을 거라며 호기롭게 PC방 문을 열었다. 그런데 정말 깜짝 놀랐다. 게임을 즐기지 않는 나는 대학시절에도 프린터 때문에 PC방에 두세 번 방문해본 게 다였다. 그래서인지 PC방 하면 그때처럼 어둑어둑하고, 뭔가 공기도 쾌쾌하며, 시간도 늦은 시각이라 분위기도 좋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불은 대낮 같이 밝게 켜져 있었고, 굉장히 넓은 공간에 엄청나게 큰 모니터 화면을 동반한 PC들이 휘황찬란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서 잠시 어리벙벙하게 서있다가 카운터에 있는 직원분에게 이용 방법을 물어봤다. 그렇게 키오스크에서 결재를 하고 자리를 잡았는데 PC를 켜고 인쇄를 하려는데 아뿔싸!  우리가 가져간 파일은 한글 파일인데 컴퓨터엔 한글 파일도, 뷰어도 없었다. 또 우왕좌왕하다가 직원분에게 말씀드려 겨우 직원 컴퓨터로 인쇄를 하고 출력비용으로 600원을 더 결재한 뒤 우리는 PC방을 나설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피곤함과 답답함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데 딸아이는 오늘 같은 분위기면 혼자 프린터 하러 PC방에 와도 됐겠다며 떠들었다. 그런 딸에게 오늘 낮에 본 뉴스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신당동 스토킹 살해 사건, 여성 홀로 사는 옆집 소리를 엿듣는 남성 등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으며, 좋은 사람도 많지만 나쁜 사람도 많다는 이야기까지...

 집에 돌아와서 아이에게 얼른 자라고 하고 노트북과 프린터를 정리했다. 그랬더니 그제야

 "엄마, 이제는 미리미리 할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하는 녀석이다. 아이 방 불을 꺼주며 

 '늘 걱정되어서 하는 엄마 말은 잔소리이고, 결국 본인이 경험해봐야 느끼고 아는 것이지.'

하는 생각에 기운이 쭉 빠졌다. 나도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전날 커피를 마셨을 때보다 더 눈이 말똥말똥 해졌다. 속이 상하면서도 심란한 마음이었다가

 '그래. 이렇게 부딪히고, 겪으면서 배우고 크는 거지. 나도 그랬을 거야. 기억이 안 날 뿐이겠지.'

하며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나는 두 아이를 학교에 보내자마자 프린터와 전쟁을 시작했다. 

잉크 양도 아직은 넉넉한데 잉크를 점검해보니 블랙만 제대로 나올 뿐 컬러 부분은 아예 인쇄도 되지 않았다. 무엇이 문제인지 프린터 설명서를 열어 하나하나 읽어보고, 검색을 해서 노즐 점검도 해보고, 정밀 청소도 시도했다. 프린터기는 청소 도중 자꾸 오류라고 뜨고, 어느덧 1시간이 넘게 흐르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당장 서비스 센터로 프린터기를 들고 갔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유튜브가 있어서 웬만한 사항들은 보고 따라 해 볼 수 있으니 나도 포기하지 않고 해 보기로 했다. 그러다가 프린터기 헤드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고, 유튜브에서 해결 영상을 찾아서 따라 하니 드디어 문제가 해결됐다. 

점검 결과도 성공적이었다. 시간은 좀 걸렸지만 기계치인 내가 이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니 뭔가 큰 일을 해낸 것 마냥 뿌듯했다. 어제에 이어 오늘 아침까지

 '사춘기 딸 너 때문에 내가 늙는다.'

싶었는데 이렇게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 

 '사춘기 딸 네 덕분에 내가 또 배운다'

 싶다. 

 아이는 부모를 보고 자란다고 나부터가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아야지. 나부터 모범이 되어야지. 오늘도 다짐해본다. 아직은 내 그림자 안에 있는 아이들에게 좀 더 괜찮고, 그래서 좀 더 닮고 싶은 부모가 되기 위해 오늘 하루도 파이팅이다!



  



이전 12화 현명하게 사춘기를 보내는 방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