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가 아닌 존재에 방점 찍히는 세상을 꿈꾸며
초등학생 때 친구들에게 종종 묻던 질문이 있었다.
“네 이름은 왜 ooo이야?”
질문을 받은 친구들은 당황해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며, 그런 질문이 어디 있냐고 했다. 절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했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당황스럽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진짜 궁금했다. 어쩌다 그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지, 이름을 지을 때 분명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특별한 이유까진 아니어도 어떤 소망이나 염원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에 한차례 한글 이름이 유행하면서 뜻을 알아차리기 쉽고 부르기도 쉬운 한글 이름을 가진 친구들이 종종 있었다. 좋은 뜻을 지닌 한자를 잘 조합해서 만들었다고 해도 뜻이 어렵고 수려하게 연결되지 않는 느낌이 많은 한자 이름 대신 직관적인 의미를 담은 이름이 더 끌리기도 했다. 이름은 결국 임의적인 선언 이자 약속이지만, 이름과 대상 사이에 강렬한 연결고리가 있어서 심오한 의미와 힘을 가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름의 신비한 힘을 이야기하는 소설, 영화를 보면 진짜 나를 설명해 주는 이름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사전을 펼쳐 보곤 했다.
궁금한 건 사람들의 이름만이 아니었다. 외국에 살면서 사물의 이름을 보고 들을 때 늘 같은 질문을 한다. 오이는 왜 살라탈륵 Salatalık인지, 아이스크림은 왜 돈두르마 Dondurma인지, 이 꽃은 왜 그 이름이고, 저 꽃은 왜 저 이름인지 남편에게 물었다. 해결되지 않으면 구글 선생님에게 물었고, 덩달아 한국어로는 왜 그 이름인지도 찾아보곤 했다.
손가락으로 주변 사물을 가리키며 “이건 뭐야?”와 “왜?”를 반복하는 다섯 살 아이 같은 나를 아는 가족들은 새로운 사물을 가져오면 내게 먼저 이름을 알려주고 그 의미에 대해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다. 가족들과 아침 식사를 함께 하려고 시댁에 갔던 날, 식탁에는 내 얼굴만 한 해바라기 꽃이 바삭하게 말라서 놓여 있었다. 꽃이라기보다는 잘 여문 씨앗을 잔뜩 담고 있는 접시에 가까웠다. 노란 꽃잎은 말라서 다 떨어졌고, 넓은 꽃받침 부분만 남아 있었다.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으로 집게를 만들어 해바라기 씨앗을 쏙쏙 뽑아 먹었다. 마마는 내게 해바라기가 튀르키예어로 아이치첵 Aycicek이라고 했다. 치첵 Cicek이 꽃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 아이 Ay가 해인가 보다!"
땡. 아이는 해가 아니라 달을 뜻한다고 했다. 해바라기는 튀르키예어로 달꽃이라 불리는 셈이다. 해를 따라다닌다, 해만 바라본다는 의미로 여기저기에서 해바라기, 선플라워(Sunflower), 차오양화(朝阳花, 해를 바라보는 꽃) 등으로 불리던 해바라기가 튀르키예에 와서 달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얻었다.
언뜻 듣기에 달꽃이라고 하면 달맞이꽃 같은 모습이어야 할 것 같다. 밤에 피어나서 달을 맞이하러 나온다는 의미를 지닌 달맞이꽃은 은은한 연보라색 꽃잎이 어두운 밤, 하얀 달빛과 잘 어울린다. 해바라기의 모습을 떠올려 보자. 샛노란 꽃잎은 이글거리는 햇빛처럼 펄럭이고, 햇빛을 최대한 많이 흡수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몸집을 키운 듯 꽃받침이 커다랗다. 카메라 렌즈를 줌 아웃해서 풀샷을 잡으면 키가 크고 두꺼운 줄기와 뻣뻣한 잎사귀까지 그려낼 수 있다. 쉽사리 달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달꽃이라는 이름이 계속 기억에 남아서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가 아이치첵, 달꽃을 노트에 적었다. 다른 이름들을 들었을 때처럼 이름을 유쾌하게 지었다고 감탄하며 넘어가지 못하고, 낱말이 나를 잡아끌었다. 해바라기와 달꽃(아이치첵) 사이로 더 깊게 파묻히면 왠지 내 안의 무언가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해바라기 그리고 달꽃. 두 개의 이름표를 꽃에게 하나씩 건네주며 설명할 말을 상상해 본다면? “너는 하루 종일 해만 바라보니까 해바라기야.”라는 말과 “너는 해를 따라다니는 게 아니라, 달과 같은 행동을 하니 달꽃이야.”라는 말을 번갈아 읊조렸다.
꽃에게 감정이입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해바라기라는 이름을 들으면 마치 너는 해를 바라보기만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존재가 납작해지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한 곳에 발 붙이고 사는 식물이라 사람의 눈으로 보면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터. 그렇다고 주연이나 조연도 아닌 지나가는 행인 1 정도로 대충 이름 붙이고 꽃을 무대 아래로 재빨리 내려 보낸 것만 같다.
꾸며진 무대나 카메라에 잡히는 화면에서 아주 작은 역할이라도 행위가 아닌 존재에 방점이 찍히는 세상을 상상한다. 우리가 하는 일이 우리의 이름이나 존재 그 자체가 되지 않고, 그 안에 일부인 듯 녹아든다면 어떨까? 설령 매우 애정하거나 피치 못할 이유로 하루 종일 아주 오랜 시간하고 있어서 존재의 일부가 아니라 거의 전부가 되어버릴지라도.
달꽃도 달이 해를 바라본다는 형상을 따서 지은 이름이라고 반박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달이라는 단어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수많은 이야기와 특성들을 떠올리다 보면, 해바라기보다는 달꽃이 해를 바라보는 모습 외에 다른 모습도 있다고 더 여지를 둔 이름 아닌가?
어디 내가 하는 일이 해를 바라보는 일만 있는 줄 아느냐고 해바라기가 투덜거린다. 낮이면 햇빛을 최대한 많이 흡수하려고 해를 따라 고개를 움직이며 기운을 받고, 해가 지면 꽃잎을 움츠려 암술과 수술을 보호하며 밤을 보낸다고. 무엇보다 내게 더 중요한 일은 촘촘히 준비된 방에 하나도 빠짐없이 씨앗을 채워 넣는 일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