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에 누우니 김치 생각이 나서

영국에서 난생 처음 김치를 담갔다.

by 청두유

어떤 말들은 나와 아무 관련도 없고 영향력 없는 사람이 농담으로 흘렸을 뿐인데 뇌리에 박혀 오랜 시간 기억이 나기도 한다.

고등학생 시절 밥 먹고 10분 정도 TV를 시청한 후 공부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날도 별생각 없이 부른 배를 두드리며 TV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있었고, 대략 이런 대사가 들렸다.

“남편이 시어머니 김치가 제일 맛있다고, 이 김치 아니면 못 먹겠다고 말하면 그렇게 서운하고 얄밉더라고요.”

그 말이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아마 내가 바로 그 서운하고 얄미운, 그런 사람이라 양심이 찔렸기 때문일 것이다.


대체로 어떤 음식이든 거부감 없이 잘 먹고 관대한 편이지만 김치만큼은 엄마 표 김치가 아니면 손이 가지 않았다. 막 만든 겉절이는 겉절이대로, 안 익은 김치는 안 익은대로, 익으면 익은대로, 묵은지가 되면 또 그 나름의 맛과 매력이 있었다. 배추김치만 내 애정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동치미나 물김치는 밥 없이도 해치울 수 있고, 갓김치는 익힐수록 맛있는데 익을 때까지 남아 있질 않았고, 파김치는 긴 초록잎을 하얀 뿌리에 돌돌 말아서 한입에 넣어서 오독오독 씹는 맛이 있었다.

김치통에 김치를 담는 첫 순간부터 싹싹 비우고 나서도 못내 아쉬워 통에 남은 국물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서 찌개에 넣는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하고 즐기지만 그건 엄마의 김치일 때만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식당에서 사람들이 "여기 김치 괜찮다! 먹어봐!"라고 해서 먹고 나면 "응, 괜찮네~"라고 답하지만 다음 젓가락이 가지는 않았다.


엄마 김치 아니면 못 먹는 나. 내가 누군가를 서운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감수성 예민하고 사람들에게 무해한 사람이고 싶었던 어린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물론 지금은 저 말이 얄미운 이유가 단지 시어머니 김치를 좋아해서가 아닐 것임을 안다.

적어도 20여 년간 먹었을 집 김치를 좋아하는 마음이야 어찌 이해하지 못하겠느냐마는, 열심히 요리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나는 저 김치 아니면 안 된다고 말하는 눈치 없음과 말본새가 문제였을 것이다. 그래도 저 말은 쉽사리 잊혀지지 않았다.


회사에 입사하고 오랫동안 엄마표 김치와 멀어진 삶을 살았기에, 김치가 없이도 불편함을 모르고 살았다. 도리어 엄마표가 아니면 생각도 안 나니 영국에 가서도 괜찮을 거라고 안심했다. 김치 뭐 없어도 되지 뭐. 피클 먹으면 되지 라는 마음으로 영국에 왔는데 이게 웬걸? 김치가 너무 먹고 싶었다. 자려고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서 내일은 뭐 먹지? 하고 생각하는데 자꾸 김치 생각이 났다.


중국 마켓에 가면 종갓집 김치를 살 수 있었지만, 사 먹는 김치는 입맛에 맞지 않을게 분명했고 무엇보다 젓갈이 들어가지 않는 비건 김치를 먹고 싶었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고 했다. 그 논리대로 라면 김치 고픈 자가 김치를 담가야 한다.

배추를 절이고, 양념소에 찹쌀풀까지 넣었죠:)

Chinese leaf이라 불리는 배추를 사고 고춧가루, 마늘, 생강, 양파, 사과, 배, 배추 절인 물로 양념소를 만들었다. 엄마가 김장할 때에는 성인 한 명 쭈그려 앉아도 남을 대야에 채 썬 무와 갖가지 양념을 넣었다. 그렇게나 많이 양념소를 만드는데도 엄마는 당황하지 않고 언제나 간을 딱 맞췄다. 엄마 김치를 재현하고 싶어 물어봤지만 엄마의 레시피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뭐든지 결론은 “간 봐가면서 쬐끔씩 더 넣어.” 였기 때문이다. 내가 간을 볼 줄 알았다면 레시피를 물어보지도 않았을 텐데. 결국 네이버와 감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다다익선이 언제나 정답은 아닌데, 왠지 맛에 대한 불안함을 날려줍니다.

음식은 자고로 다양한 재료가 보여야 맛있다는 믿음으로, 양파, 당근도 채 썰어서 양념에 넣었다. 배추를 절이고 양념소를 만들고 절인 배추에 소를 켜켜이 넣으며 애기 목욕시키듯 배추 머리를 곱게 쓰다듬으면서도 이게 정말 김치가 될까 의심했다. 나 자신이 못 미더웠다. 다 만들고 나서는 매일 김치통에 귀를 갖다 대고 보글보글 끓어오는 소리를 확인했다. 괜히 열었다 가는 김치를 익히는 균들이 다 죽어 버릴 까 봐 (근거는 없다) 차마 열지 못하고 소리만 들었다.

김치 익는 소리가 이렇게 행복한 소리였음을 처음 알았다.


잘 익은 김치는 보물입니다. (벌써 얼마 안남아서 슬픔ㅠ)

4일 동안 숙성시켰다가 처음 포기김치를 꺼내서 먹었던 그 맛을 잊지 못한다. 시원하고 새콤한 맛에 입에 넣고 씹는 순간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때 알았다. 나는 뼈 속까지 한국인이었다.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내 몸이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남자친구에게 나는 K-girl인데 여기서 K는 Korea가 아니라 Kimchi라고 외쳤다.


김치찜(왼쪽)그리고 마지막 국물은 김치전(오른쪽)이 되었습니다.

김치찜, 김치볶음밥, 볶음김치, 두부김치.. 다양한 김치 요리를 즐기다 보니 벌써 네 번째 김치를 담갔다. 처음에는 엄청난 노동 같았던 김치 담그기도 이제는 기계적으로 척척 해낸다. 남자친구까지 가르쳐서 함께 만드니 한결 수월해졌다.

친구들은 모두 놀라며, “니가 그렇게 김치를 좋아하는 줄 몰랐어.” 라고 말했다. 사실 나도 몰랐다. 김치를 그리워하다가 직접 담그기까지 하게 될 줄은. 엄마 김치에 대한 외골수 사랑을 끝내고 내 김치까지 사랑하게 될 줄은.

퓨전 음식도 도전! 김치파스타(왼쪽) & 깍두기 불거라이스(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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