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콤플렉스는 20년 동안 나를 괴롭혔다.
번듯한 직장에서 일 잘하고 있으면서 왜 굳이 큰돈 들여가며 유학을 가려고 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지금 일하는 분야를 더 공부하고 싶어서, 글로벌 감각을 키우고 싶어서 등 그럴싸한 이유들을 찾아 이야기했지만 말 못 한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약 20년 동안 지독하게 미워했던 영어와의 싸움을 끝맺음하기 위해서였다.
뭐든 잘해야만 직성이 풀렸던 어린 시절의 나는 처음 영어 학원에서 입학시험을 치르고 충격에 빠졌다. 같은 반 친구들보다 눈에 띄게 낮은 70점이라는 내 점수를 믿을 수가 없었다. 나를 미워할 수도, 그렇다고 시험을 잘 본 친구들을 원망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애꿎은 영어에 모든 분풀이를 쏟았다. 그때부터 "영어가 제일 싫어."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제도 앞에 무력한 수험생은 싫든 좋든 시험 과목에 맞춰서 공부해야 하는 법. 영어 공부를 할 때마다 온몸을 꼬아댔지만 그래도 수능까지는 어떻게든 꾸역꾸역 공부했다. 수능은 그저 시작에 불과했고 대학교에 가서 영어에 대한 전의를 완벽하게 상실하고 말았다. 주변 친구들은 대부분 외국에서 살다 온, 이른바 외국물 좀 먹어본 유학파들이었다. 그들의 발음은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굴러다녔고 팝송을 듣고 외국 개그에 깔깔 웃는 등 외국 문화에 친숙해 보였다. 영어를 쓸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준다는 회화형 학원도 다녀보고, 암기와 주입식 교육을 통해 영어 점수를 만들어준다는 토플 학원도 다녀 봤지만 소용없었다.
한번 싫어진 언어를 잘하게 되는 것은 꽤나 어려운 목표였다. 그렇게 영어에 이별을 고하고 전공으로 중어중문학과를 선택해 중국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래, 너와 나의 지독한 악연은 절대 사랑으로 극복할 수가 없나 보다. 안녕.’
교환학생으로 중국에 다녀오고 나니 중국어는 나에게 더 친숙하고 애착이 가는 언어가 되었고, 영어는 더더욱 낯선 언어가 되었다. 이제 곧 중국의 시대가 올 것이고 중국 관련 직업을 찾으면 될 테니 영어 그까짓 거 조금 못해도 괜찮다고 굳게 믿었다. 착각하며 영어와의 거리감을 정당화했다.
취직을 하는 그 순간까지도 몰랐었다. 아니 더 미리 알았어야 했다. 영어와 나는 절대 떨어질 수 없는 사이였음을.
회사에 입사해서 맡게 된 업무는 PR (Public Relations), 주로 영어로 보도자료를 쓰고 기자들에게 브리핑을 하는 일이었다. 언어로 설득하고, 호소력 있는 글을 쓰는 일에 늘 관심이 있었기에 업무 자체는 만족스러웠지만 문제는 그 매개 언어가 영어라는 점이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아니나 다를까 모두 해외대 출신이었고, 그들의 영어 앞에 또다시 나는 작아지고 초라해졌다.
업무를 할 때마다 답답했고 나의 부족함이 너무도 선명하게 보였다. 일을 잘 끝마쳐도 영어 때문에 더 잘할 수 있는 걸 그만큼 해내지 못한 것 같았고,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면 영어 때문에 그렇게 된 것 같아서 자책을 했다.
그러면서 취업을 하며 잠시 접어 두었던 대학원에 대한 욕심이 조금씩 마음에 생겨났다. 영어에 한이 맺힌 덕에 꼭 영어권 국가에서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었는데, 그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영어 때문에, 하는 일에 대해 더 알고 싶고 공부하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유학을 고민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사람들은 막상 유학 다녀와도 별거 없다는 조언을 하며 말렸다.
유학보다 여기서 실무를 하면서 배우는 게 더 많을 거라며 붙잡기도 했고,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 괜히 주눅 들지 말라는 격려를 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그 마음은 사라지지 않고 커지기만 했다. 내가 직접 해보지 않는 이상 이 마음을 버릴 수 없을 것 같았다. 돈을 얼마를 들이든, 나중에 후회를 하든 한 번은 꼭 다녀와야 콤플렉스를 극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가지 않는다면 매번 난관이 봉착할 때마다 유학을 갔어야 했어 라고 후회할 내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더 이상 나를 부족한 사람이라는 틀 안에 가둬놓고 채찍질하고 싶지도 않았고, 못나게 남이 가진 능력을 부러워만 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도 않았다.
12살부터 32살까지 20년 동안 영어에 대한 지독한 갈망과 미움은 나를 괴롭혔다.
그러니까 나는, 나를 그만 미워하고 싶어서, 이곳 영국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