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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두유 Jan 26. 2022

새벽 다섯 시 나를 깨우는 이맘 목소리

아침형 인간이 되고 싶다면 튀르키예로..?

강철 체력으로 새벽까지 밤새 부어라 마셔라 한다는 그 대학생들도, 하루 종일 몸을 둥글게 말고 자다가 밤만 되면 우다다다- 달리며 술래잡기하는 그 고양이들도 지쳐서 잠든다는 새벽 다섯 시. 튀르키예에는 이 시간마다 사이렌처럼 온 동네에 울려 퍼지는 소리가 있다. 


튀르키예에서의 첫새벽, 웬 남자가 확성기에 웅얼웅얼 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싶어서 벌떡 일어났다. 터키어를 알아듣지 못할뿐더러 이 국가의 시스템을 모르니 화재 경보인지 아니면 지진 경보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귀를 쫑긋 세우고 두리번거리며 소리의 정체를 찾는 나에게 남자친구는 별 일 아니니 걱정 말라면서 이맘 목소리라고 알려주었다. 



이맘(Imam)은 천주교에서의 신부, 개신교에서의 목사와 같이 이슬람교의 성직자를 의미한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맘은 일반 신자들과 다른 권력이나 지위가 있지 않다. 모스크에서 사람들이 기도를 할 때 앞에서 기도를 함께 하며 이끌어주고, 신앙에 대한 궁금증이 있는 신자들의 질문에 답변을 해주는 역할에 그친다. 


왜 이맘은 꼭 새벽 다섯 시에 저렇게 소리를 내서 잠을 방해하냐는 물음에 남자친구는 새벽 다섯 시에만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고 답했다. 이슬람교의 교리에 따르면 하루에 다섯 번 신께 기도를 올려야 한다. 해의 위치에 따라 정확한 기도 시간은 달라지나, 일반적으로 해 뜨는 새벽 5시를 시작으로 오후 1시, 오후 3시, 오후 6시, 해 지고 난 오후 7시이다. 이 시간마다 모스크에서 기도 시간을 알리는 알람인 에잔(Ezan)을 동네에 내보낸다. 


밤에 들려오는 에잔(Ezan) 

옛날 시계가 없었던 사람들에게 이맘이 내는 소리가 기도 시간을 알려주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아마 대충 이런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믿음 깊은 신도 여러분, 기도드릴 시간입니다. 모두 일어나 몸을 정갈히 하고 동쪽 태양, 알라를 향해 기도를 드립시다. 시간이나 여건이 되시는 분들은 지금 모스크로 와주셔서 함께 기도드리셔도 좋습니다."


대낮에 에잔을 듣는 것은 견딜 만 한데 새벽 다섯 시는 강력하고 괴로운 알람이었다. 정말 피곤한 날엔 못 듣고 자고 싶은데 할 때 이맘의 목소리는 며칠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나를 깨웠다. 하루는 무슨 이유인지 모르나, 볼륨을 2배나 더 올린 소리가 동네에 울려 퍼졌고 나는 참다못해 소리쳤다. 


“이맘!!! 내가 당신을 반드시 찾아낼 거야!!”

꼭 저 이맘이 일하는 모스크에 찾아가서 경고를 할 거라며 반 잠꼬대를 웅얼거렸다. 



놀랍게도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었다. 한쪽으로 기울어져 비정상처럼 보이는 저울도 그 상태가 계속되다 보면 그게 정상이 되듯 매일 5번씩 울리는 이맘의 노랫소리, 기도 소리가 어느새 익숙해졌다. 한 달 정도 지났을까? 이맘 목소리는 변함없이 새벽 다섯 시에 울려 퍼졌지만 아침 8시까지 통잠을 자기 시작했다. 더 이상 새벽녘에 이맘을 찾아가겠다고 외치지 않아도 되는, 이맘의 목소리가 잔잔한 일상이 되었다. 



이맘은 아랍어로 사람들에게 기도 시간을 알리기 때문에 튀르키예 사람들 대부분 이맘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고 한다. 튀르키예어로 말하더라도 나는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몰랐겠지만 사람들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서 그 소리에 배경음악처럼 익숙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단어와 문장으로 새벽마다 외쳤다면 아무리 이곳에 오래 살았어도 눈 뜰 확률이 더욱 높았을 것이다. 



가끔 낮에 일하다가 이맘 목소리를 들으면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치는데 사람들이 새벽에 깨지 않는다는 점이 놀랍다. 사람들은 살면서 환경에 결국 익숙해진다는 것을 다시 깨닫는다. 지금 당장 어떤 일 때문에 못 살 것 같고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만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고 무뎌지는 일들이 더 많다. 날마다 다섯 번씩 울려대는 이맘의 목소리처럼 말이다. 정말 못 살 것 같은 일은 매우 드물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시간이 흘렀는데도 도저히 안 참아지는 것들, 못 살 것 같은 것들이 있을 때에는 더 참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건 정말 참을 수 없는 일일 테니까. 아무리 노력해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 것들은 과감하게 적응하지 않는 선택도 분명 세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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