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인사하지 않는 사람
오래 끓여 모서리가 부서진 뭉근한 브로콜리를 가득 넣은 야채수프가 생각나는 밤이었다. 편안한 식탁과 의자를 두고 부러 거실에 놓은 탁상에 마주 앉아서 말린 할라피뇨를 손으로 부셔서 넣어 뒷맛이 제법 매콤한 수프를 마시고 싶었다. 콧잔등과 인중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고 심장부터 발끝까지 데워진 듯 온기를 품고 눈이 가득 쌓여서 어둡고 푸르게 빛나는 바깥을 바라보고 싶은 눈 내리는 날이었다.
“퍽”
그 순간, 온 집안을 감싸고 있던 따뜻한 수프 같은 공기가 냄비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고양이들도 놀라서 제자리에서 점프해 털을 가득 세우며 소리가 난 쪽으로 몸을 돌렸다. 무언가 창문에 맞은 듯한 둔탁하고 육중한 소리였다.
영국에서 밤이면 창문으로 돌을 던지며 시비 걸던 청소년들이 뭘 알고 여기까지 찾아온 건가? 내 얼굴을 안 비추는 게 싸움에 더 유리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차갑게 식어서 딱딱하게 굳어 한 덩어리가 되어 버린 듯한 적막을 풀어헤치며 남편이 창문 쪽으로 걸어가 커튼을 걷었다.
굵은 눈이 쏟아지는 도로 위로 두 그림자가 보였다. 동그랗고 커다란 그림자는 덥수룩한 수염만큼 짙고 까맸으며, 옆에 있는 작은 그림자는 아이들이 낮에 가지고 놀던 공처럼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알리와 알리의 아들이었다. 알리는 남편에게 눈 오는데 나와서 놀자고 소리쳤고, 남편은 모르는 사람이 던진 거였으면 싸우러 나갔을 거라면서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갔다. 삼십 분 정도 지났을까 남편은 집으로 돌아와 눈을 밟으러 같이 나가자고 했다. 패딩을 챙겨 입고 부츠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
알리는 아내에게도 같이 놀자고 졸랐는데 춥다고 나가고 싶으면 혼자 나가라고 혼났다며, 영화 <알라딘>에서 소원을 들어주던 램프의 요정처럼 “으하하하하!” 하고 웃었다. 여섯 살 정도 된 아이는 처음 본 외국인(=나)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부끄러운 듯 몸을 흔들며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입을 실룩거렸다. “Hi(안녕)”하고 인사를 건네자, 아빠 뒤로 숨어서 몸을 가리고 얼굴만 살짝 내밀었다. 영어로 이야기해보고 싶다고 했잖아 하며 아빠가 부추겨도 “기억 안 나!” 하며 얼굴을 아빠 바짓가랑이에 파묻었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따뜻하고 노란빛이 가득한 집에서 이불을 덮고 몸을 녹일 때까지도 알리는 자전거 뒤에 아들을 태우고 눈이 가득 쌓인 내리막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늦은 밤까지 계속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행복을 끌어안고 있다가 온몸으로 뿜어내는 듯한 아이의 웃음소리가 도로에 가득했다.
작년 가을에 이미 완공되었어야 할 우리 아파트는 인플레이션으로 공사가 중단되고 늦어졌다. 남편은 매일 공사장에 직접 출근해서 인부들이 쉬는 곳에 찾아가 함께 차를 마시며 스케줄을 정했다. 알리는 아파트 단지의 전기 시설을 총괄하는 관리자이자, 그때 안면을 튼 이웃이다.
한 번은 잦은 정전으로 화가 난 주민들이 왜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냐며 알리를 몰아세웠다. 억울해서 얼굴이 빨개진 채 말을 잇지 못하는 알리를 대신하여 남편이 나서서 주민들에게 일하는 사람들 잘못이 아니라고 상황을 설명했다. 그때 이후 알리는 더욱 남편을 신뢰하고 좋아했다. 전기 시스템이 안정적이지 않아서 와이파이 공유기나 전등을 새로 설치하려면 전기 기사가 체크해주어야 하는데, 알리는 우리 집 일이라면 바로 시간을 내어 와 주었다. 가깝고 친한 사이도 아닌데 우리 집 문제를 먼저 살펴 주는 알리에게 무척 고마웠다. 종교를 비롯하여 많은 부분이 확연하게 달라서 앞으로도 더 친해지기는 어려울 거란 걸 서로 어렴풋이 알고 있는데도, 설명할 수 없는 호의를 나누었다.
남편이 외출하고 집에 없었고, 일하다가 신호를 감지했다. 첫 번째, 냉장고에서 삑삑 소리가 나고 불이 꺼졌다. 두 번째, 로봇 청소기가 충전이 되지 않고 있다고 기계음으로 알렸다. 예고 없이 또 정전이라는 신호였다. 노트북을 덮고 소파에 앉아서 무릎 담요를 덮었다. 고양이들이 다가오고 책을 읽으며 기다렸다. 길게는 밤까지, 짧게는 한두 시간 정도 걸릴 것이다.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알리가 곧 올 거라고 했으니 문을 열어 달라고 하면서 집집마다 확인하느라 목마른 것 같은데 오면 물 한잔 줄 수 있겠냐고 부탁했다.
알리가 문을 두드렸고, 나는 문을 열어주면서 “메르하바Merhaba(튀르키예어로 안녕)”하고 인사하며 물 한잔을 건넸다. 그는 생각지 못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허허허 웃으며 사려 깊다고 말했다. 물을 들이켜고는 정말 고맙다고 여러 번 말하고, 두꺼비집을 확인하고 돌아갔다. 알리는 그 후로도 남편을 만날 때마다 남편을 붙잡고 한참 동안 놔주지 않았다. 남편에게 고기를 굽고 놀기 좋은 곳이 있다면서 같이 놀러 가자고 하고, 한국 사람들이 매운 음식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동튀르키예 출신인 아내도 매운 음식을 잘 만드니 집으로 초대하겠다고 했다.
남편과 아이스크림을 사서 입에 물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알리가 아파트 단지 안에서 앞서 걸으며 휴대폰을 들고 소리치고 있었다. 알리의 뒤에는 알리의 아내가 아이 손을 잡고 뒤따르고 있었다. 발목 위로 올라오는 검은색 양말에 슬리퍼를 신고 황토색 반바지에 면 100%인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는 알리와 몸에 들러붙지 않는 하늘하늘한 소재이면서 그 어떤 것도 비치지 않는 검은색 천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뒤덮은 채 눈만 밖으로 내놓은 니캅(Niqaab)을 입은 아내. 알리는 남편에게만 인사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알리와 마주칠 때마다 왜 기분이 묘했는지 깨달았다.
알리는 항상 나를 보면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대했다. 부러 외면하는 듯 눈길도 주지 않았다. 물 한잔을 받고 고맙다고 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알리는 나에게 웃으며 인사를 나눌 이웃으로 등극했는데, 알리에게 나는 투명인간이었다. 혹시 아내는 다른 남자의 소유물이라 종교적, 암묵적인 협정에 따라 인사하지 않겠다는 건가 싶어 불쾌했다. 독실한 이슬람교 신자들에게 가족이 아닌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죄악이다. 눈 빼고 다 가린 아내와 달리 민소매에 짧은 반바지를 입고 다니는 나를 쳐다봐서도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어릴 적 비트박스를 좋아하고 팝송을 즐겨 들었다는 알리는 그를 똑 닮아 개구쟁이에 호기심 많을 아들한테 외국인인 나와 영어로 인사하라고 부추기지만 본인은 절대 나를 쳐다보지 않는다. 아내와 함께 걷지 않고 뒷짐 지고 앞장서서 걷는다. 아이들과 또래처럼 놀며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는 아버지와 절대 다른 성별을 바라봐서도 안 되는 보수적인 무슬림 남자 사이의 간극이 당황스럽다.
유쾌한 아버지의 모습에, 호의에 감사할 줄 아는 이웃의 모습에 친근한 눈빛을 보낸다. 인사를 나누려고 다가가려다가, 미처 보지 못한 등 뒤로 겹쳐진 다른 모습들을 발견하고 멈춰 선다. 촘촘하게 덧입혀진 그림자 사이로 돌려받지 못할 시선이 튕겨져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