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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두유 Oct 21. 2022

내가 가졌던 이름표

진짜 이름을 찾아서 

중학교 2학년 때 장래 희망과 꿈을 써서 내는 숙제가 있었다. 장래 희망은 나중에 매일 하는 일일 테니 즐거운 일이었으면 좋겠고, 꿈은 이루고 싶은 목표이니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랬더니 정확한 직업을 써야지 장난하냐고 선생님께 된통 혼났다. 

남들에게 인정받을 만한 “이름”을 얻기 위한 여정을 보냈다. 좋은 대학, 좋은 회사 등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명함을 가지려고 쉼 없이 달렸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꿈도 이룰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직장인이 되니 명함을 지키기 위한 전투가 펼쳐졌다. 새벽 1시까지 컵라면을 먹으며 보고서를 쓰고 새벽 5시에 출근해서 출장 백업을 하며 근성 있는 사원으로 인정받았다. 자기소개서에 어릴 적부터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전 세계를 누비는 삶을 꿈꿔왔다고 썼다가, 정말 한 달에 한번 꼴로 비행기를 타며 일했다. 잦은 출장으로 피로가 쌓이다가 아침에 쓰러지기도 했지만 깨어나서 바로 출근했고 아무렇지 않게 일했다. 팀에서 제일 일을 많이 하는 사원. 홍보 파트 실세. 왜 이렇게까지 애쓰는지 나조차 이해가 가지 않으면서도 인정받는 만큼 따라오는 보상과 승리감은 중독성이 강했다. 


하지만 회사 일에 스며들수록 마음이 공허해졌다. 허해도 별 수 없으니 더 열심히 하자는 마음으로 자기 계발에 손을 댔다. 미디어 분야를 공부해보려고 방송통신대학교와 에디터 스쿨에 등록했고, 보도사진을 잘 찍고 싶어서 사진을 직접 배웠다. 취미 생활도 놓치지 않았다. 독서 모임을 하고 그림을 배우고 매주 출사를 나갔다. 그야말로 발광했다. 


직무 전문가라는 명함을 얻으면 나아질까 싶어 휴직하고 영국으로 석사 유학을 떠났다. 갑자기 원래 있던 세상에서 뚝 떨어져 나왔다. 아무도 내 명함에 관심이 없었다. 이름표를 내려놓자, 오히려 편안해졌다. 모든 시간이 나를 중심으로 흘러갔다. 삼시 세끼를 직접 만들어서 챙겨 먹고, 스스로 스케줄을 짜서 공부하고 운동을 하고 취미 활동을 했다. 당연히 달려야 했고, 무조건 얻어야 했던 것들에 의문이 생겼다. 지키려고 애썼던 이름들은 내가 원하는 거였을까? 즐겁고 행복했나?


고민이 지속되던 어느 날, 아침을 먹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영국에서 보기 드물게, 푸르다는 말에 충실한 하늘이었다. 이렇게 하늘을 볼 수 있는 오늘이 소중했다. 좋아하는 일을 해도 모자랄 날들이었다.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고, 남자 친구에게 생각을 털어놓았다.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다른 일을 하는 건 불행한 것 같아.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살래. 그런데…" 

"아니, 그런데는 없어. 결정했으면 하고 싶은 대로 하자. 그런데 뒤는 생각하지 말고." 


“그런데” 뒤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명함이 사라지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까 봐 불안했다. 손에 쥐고 있던 명함을 펼쳐 놓았다. 괜찮은 대학을 나와 대기업에 다니며 LA, 바르셀로나 등 해외를 누비는 홍보 팀. 러시아, 몽골 등 낯선 나라로 휴가 가서 사진 찍는 욜로 직장인. 내가 원하는 이름들이 아니었다. 여행과 소비를 간식 삼아 판단을 유예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원한 적 없었지만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도 모르고 달려왔다. 한 때는 원한다고 믿어 보기도 했지만 얻고 나서 행복하지 않고 오히려 불행했다. 이제 그날들이 새겨진 이름표를 꺼내 한 장씩 날려 보낸다. 비우고 나면 진짜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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