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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두유 Oct 30. 2022

스님께서 셋째네 딸이 집안을 일으킬 기둥이라고 했다

진짜 이름을 찾아서

"스님이 느그 딸이 우리 집안을 일으킨다고 혔어야." 

시골에는 종교와 무속신앙이 자연스럽게 결합하여 어르신의 마음을 든든하게 지탱해주는 영리한 절들이 많다. 할머니는 매년 초파일에 아들, 딸, 손자, 손녀 이름이 적힌 등을 절에 올리시고 스님께 우리 앞날을 물어보곤 하셨다. 스님은 셋째 아들네 딸내미가 제일 똑똑하다며, 가문을 일으킬 정도로 크게 될 인물이라고 말씀하셨다. 은은하고 알록달록한 수 백 개가 넘는 빛 물결 속에서 내 이름과 생년월일이 쓰인 연등이 환하게 빛났다. 할머니는 가문에 대한 투자의 일환으로 나에게 전보다 더 아낌없는 사랑과 지지를 주셨다. 


명절마다 며느리이자 엄마들이 부엌에서 반찬통과 양푼 그릇 채로 반상에 올려놓고 허겁지겁 먹는 동안, 거실에서는 손하나 까딱 안 하고 물 하면 물이 나오고 술 하면 술이 나오는 이상하고 아름다운 나라가 펼쳐졌다. 스님의 한마디로 집안에서 존재 가치를 인정받은 덕분인지 할머니는 나에게 집안일을 시키지 않으셨다. 남자들이 안방에서 차례를 지낼 동안, 여자들은 부엌과 안방 사이 미닫이 문에 붙어서 음식과 제기들을 빠르게 나르고 정리했다. 연등 빛을 따라 나는 부엌에서 나와 안방으로 들어갔다. 가문을 일으킬지 모르는 나는 조상님께 잘 보여야 한다며 제사상에 절을 올렸다. 


여자지만 가문의 예비 기둥으로 꽤 달콤한 대우를 받았다. 할머니는 늘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챙겨 주셨고,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곶감이며 귤이 담긴 봉지를 몰래 손에 쥐여 주시곤 했다. 존재만으로도 든든한 장손, 함께 벌초하고 제사 지낼 든든한 조력자 오빠. 그 외에는 모두 결혼하면 남이 될 딸들이었다. 할머니를 사랑했고, 당신께서 돌아가신 지금도 그리움에 가끔씩 마음이 아리지만 내가 받은 사랑이 조건부 이자, 갚아야 하는 부채 같았다. 


대학에 입학한 뒤 명절에 할머니 댁에 손님이 올 때마다 나는 안방으로 가서 인사를 했다. Y대 다니는 셋째 네 딸내미로 소개받으며, 누군지도 모르는 아재들에게 얼굴 도장을 찍었다. 입사하고 나서 설명이 몇 줄 더해졌다.

“아가 S전자 들어갔잖여. 비행기 타고 미국으로 출장도 많이 다닌답더라.” 

큰 사람이 되어야 했다. 어떤 사람이 대단한 사람인지, 성공이 무엇인지 깊게 생각해본 적 없지만, 일단 무조건 무언가가 되어야 했다. 이 가족 사회에서 내가 맡은 역할을 수행해야만 이곳에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뭐든 될 수 있지만, 그 “뭐든”은 남들이 봤을 때 인정할 만한 것이어야 했다. 


연등 앞에 선 내 그림자는 크고 듬직한 기둥 같았다. 한 때는 그 모습으로 온 가족의 기대를 받는 것이 죽어라 달릴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열심히 공부하고 취업 준비해서 회사에 입사했을 뿐인데, 그걸로 누군가가 행복하다니 뿌듯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정작 나는 불행했고, 다른 길을 찾아보고 싶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덜 후회할 것 같아서 퇴사하겠다고 말했다. 한 번만 하고 싶었던 일에 도전해보겠다고 말했다. 여태까지 선명해 보였던 불빛이 바람에 흔들거리며 일렁였고 그림자 기둥도 출렁거렸다. 안전한 길을 놔두고 왜 실패하는 길로 가려하냐며 실망스럽다고 했다. 조금만 참아보라고, 그게 모두에게 행복한 길이고 결국 너도 행복할 거라고 했다. 내 행복이 다른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뒤에서 나를 붙들었다. 


연등 속 불씨가 꺼질까 조마조마하며 불빛이 비추는 곳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걸으며 살았다. 꿈 따위 조금만 포기하면 안 되겠냐는 말에 눈을 꼭 감고 뒤돌아 까치발을 한 채 훅- 불을 껐다. 목소리가 들렸다. 

"다 너가 좋아서 선택한 거지, 우리가 언제 억지로 떠밀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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