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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두유 Oct 30. 2022

그녀는 주식회사 파란 제국이었다

진짜 이름을 찾아서

나는  2014년 여름 그녀를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녀는 그 해에 1년 반의 취업 준비를 끝내고 한국 대기업 중 최고로 꼽히는 주식회사 “파란 제국”에 입사했다.


회사에 정식으로 출근하기 전 그녀는 연수원에서 약 한 달가량 기업 연수를 받았다. 선배, 동기들과 함께 합숙하며, 기업의 역사, 이념을 공부하고, 회사 생활에 필요한 자질을 배웠다. 그녀는 회사 가치를 외치며 게임을 하고, 회사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연극을 만드는 게 왜 회사생활에 필요한지 몰랐다. 사람들은 이 기간을 “파란 피를 수혈해서 기존의 우리에서 벗어나 초일류기업의 일꾼으로 거듭나는 과정”이라고 표현했다. 회사 응원가를 부르며 과정이 끝날 때 즈음 그녀는 무언가를 성취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나도 이제 파란 피가 흐르는 사람인 걸까?’ 그녀는 핏줄이 퍼렇게 비치는 손등을 만지작거렸다.


출근 첫날, 신입사원의 필수 코스로 팀 전체에 자기소개 메일을 돌렸다. 뮤지컬을 좋아하고 글 쓰는 취미를 가지고 있으며 둘리의 고향 쌍문동에서 태어나 둘리처럼 친근한 사람이라고 적었다. 즐거운 학교 생활을 보냈던 것 같은데, 회사는 그렇게 만만하고 행복한 곳이 아닙니다.라는 답장을 받았다. 그녀는 답장을 보낸 사람이 아직 파란 피를 갖지 못해서 화가 난 건 아닐까 싶었다.



그녀는 파란 제국의 명함을 받고 나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사회에서 행해지는 테스트를 손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성벽 밖에서 그녀를 섣불리 좋게 평가하고 마음대로 오해해도 굳이 해명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주식회사 파란 제국 마케팅팀 OOO입니다.”

그녀는 한 문장으로 자기소개를 하고 명함에 맞는 사람이 되어 갔다. 목소리가 아기 같다는 지적을 받고 나서 목소리를 낮게 깔고 다나까를 쓰기 시작했다. 그 후로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그녀에게 혹시 군인이냐고 묻곤 했다.


의견을 내거나 생각하지 말고 그냥 윗사람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사회생활이라고 했다. 문서에 담기는 메시지보다 어떤 폰트, 어떤 글씨 크기를 써야 하는지, 스테이플러를 어디에 어떤 각도로 찍어야 하는지가 더 중요했다. 회식과 출장을 다니며 고기를 어떻게 구워야 하는지, 소맥을 한 입에 털어 넣을 수 있는 양으로 정확하게 제조하는 방법 등을 배웠다. 그녀는 “업”이라는 단어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숨어 있는지, 그리고 대부분 계약서나 업무 설명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의 집도 변했다. 땡땡이, 꽃무늬, 형형색색 화려한 원색이 가득했던 그녀의 옷장은 점점 무채색 정장으로 채워졌다. 출장에 필요한 편안하면서 비즈니스 캐주얼 옷에도 잘 어울리는 구두, 운동화가 신발장을 점령했다.


파란 제국을 위해 일한다는 사실 하나로 자신을 사회에 증명할 필요도 없고 누군가보다 따뜻한 안 쪽 세상에 있으나, 동시에 그녀는 부끄러웠다. 파란 제국이라는 전광판에 가려서 뭔가를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회사가 힘들어도 밖은 더 지옥이라고 다들 이야기했다. 성문 밖에 나가본 적 없는 그녀는 성문을 열면 바로 절벽이라고 믿었다. 이곳이 최악은 아니니 지금 우리에게 최선일 수 있다고 서로 위로했다.


떠날 수 없다면 제국에서 자리를 찾겠다고 수년간 밤낮없이 일하고 주말을 반납했다. 보고서를 수백, 수천 장을 만들고, 활자들이 살아 움직이는 착각이 들 정도로 보도자료를 한 건당 수십 번씩 고쳤다. 하지만 그녀는 점점 파란 제국이라는 전광판에 가려서 자신을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언제든지 다른 이름으로 대체할 수 있는 명함을 가졌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열심히 일해서 좋은 평가를 받고 월급이 올라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오면 제국의 왕좌에 작은 보폭이나마 가까이 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제국에 들어와서 마주한 수 없이 많은 문 중에 하나 정도는 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다. 그녀는 자기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나는 주식회사 파란 제국 사람이 아닌데, 이제 나는 무엇 일까?’ 횡설수설하며 시작한 대학원 생활은 공부, 토론 그리고 에세이의 연속이었다. 각자 공부하고 함께 토론하며 결론을 도출했다. 현상이나 상황을 분석하여 주장을 펼치는 에세이를 써냈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의견을 이야기하면서 그녀는 차츰 하고 싶은 말을 기억해냈다.


그녀는 파란 제국에서 명함 한 장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값진 경험들을 얻었다. 사회생활로 뭉뚱그려지는 여러 부조리를 개인의 영역에서 체험할 수 있었고, 사람 때문에 힘들기도 했지만 또 좋은 상사, 좋은 동료 덕분에 함께 성장하는 행운을 누렸다. 타이틀을 붙이지 않아도 그녀는 그녀였다. 그녀는 더 이상 주식회사 파란 제국 대신 나를 말하는 것이 두렵지 않다.


그곳에서 보낸 시간들과 경험을 지나서 내가 진짜 어떤 사람인지 깨달았다. 검은색 정장 원피스, 검정 구두, PR 하는 사람은 패션 센스가 있어야 한다 해서 샀던 하얀 재킷과 스카프들. 모든 옷을 옷장에 넣어두고 해바라기가 잔뜩 그려진 원피스, 도트무늬 재킷, 몸에 달라붙는 짧은 청 원피스를 캐리어 가방에 넣어서 길을 떠난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OOO이고요.” 뒤에 내가 덧붙이고 싶은 문장들이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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