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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 Apr 21. 2020

딸아. 아빠보다 하루만 덜 살아줘.

특별한 아이를 키우는 모든 부모의 마음

이 무슨 개소린가? 

할 것이다. 어떤 부모가 자녀가 오래오래 살길 바라지 자기보다 먼저 죽길 바라겠는가? 하지만, 특별한 아이를 키우다 보면 일생의 소원이 되기도 한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까?


 나는 결혼하기 전부터 첫째 아이가 태어난다면, '선교사'가 되길 원했다. 타향에서 사랑으로 살다가, 그 땅에서 그 민족과 함께 묻히길 원했다랄까? 그래서 사실 첫째 아이는 '딸'보다 '아들'을 원했다. 아무래도 낯선 땅에 보낼 생각을 하니 남자가 더 나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첫째 아이는 딸이었다. 그렇다고 실망하지 않았다. 딸은 모든 아빠들의 워너비 아닌가?


 첫째 아이가 태어날 때가 7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당시 난 잠시 교회를 사임하고 영등포에서 아는 형의 소개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한창 알바를 하고 있는데, 아내에게 전화가 와서 곧 아이가 나온다고 한다니, 책임자에게(?) 이야기를 하고 급하게 지하철을 타고 갔다. 사실 택시를 타고 갔어야 했는데, 본래 진통하면 바로 애가 나오진 않으니 넉넉히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병원에서 주는 가운을 입고, 첫째 딸을 받고, 탯줄을 잘랐다. 무슨 진통한 지 1시간도 안돼서 낳는 사람이 있을까? 그게 우리 아내였다. 첫째 아이는 머리숱도 많고, 4킬로 넘게 태어났다. 장모님이 말씀하시길 조금 더 늦게 낳았으면 책가방 메고 학교 갈 뻔했다고, 농담하실 정도였다. 보통 애 낳기 전에 병이나 유전병, 장애가 없는지 검사를 한다. 그땐 아무 이상이 없었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신체 발달은 정상적이었는데, 말을 하지 못했다. 조금 걱정스러웠지만, 나도 어렸을 적에 말 트이는 게 느렸다고 하니, 그냥 나를 닮아서 그런가 보다 했다. 하지만 3년이 지나자 의심은 곧 확신을 바뀌었다. 병원에 가서 검사받을 때, 퍼즐에 집착하고, 사소한 디테일이 망가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첫째의 모습을 보며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자폐아.


 자녀의 장애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모도 많다고 한다. 그래서 오히려 치료도 더 늦어져서, 아이가 충분히 발달할 수 있는 것을 제한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첫째 아이의 장애를 빨리 인정하기로 했다. 일찍 인정한 덕분에 적절한 치료를 조금 더 일찍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아이가 울거나 극심한 짜증을 낼 때,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알기가 쉽지 않아 곤혹스러울 때가 많았다. 다른 아이들보다 교육도 다르게 하고, 교육을 받아들이는 수준도 낮다 보니, 기저귀도 오래 찼다. 심지어 자기의 화를 주체하지 못할 때면, 그대로 소변을 보기도 했다. 나는 나대로 답답하고, 첫째 아이는 첫째 아이로 답답했다. 어느 날, 울면서 옷을 입을 채로 그대로 소변을 본 아이를 화장실로 데려가 씻기다가, 둘 다 펑펑 울기도 했다. 이 모든 게 내 잘못인 것만 같았다.


 장애아를 키우는 부모가 그 장애를 알았을 때, 처음 드는 감정은 아마 죄책감이 아닐까? 혹시 나 때문인가?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거지? 아마 아내의 죄책감은 더 심했을지도 모른다. 처남도 가벼운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혹 자기 가족력이라고 생각이라고 생각하면 어떨지.. 그 마음은 상당하게 상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내 부모님도 그 말을 꺼내지 않았고, 나 역시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다만 아내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네 탓이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


 사실 이 말은, 나 자신을 위로하기도 했다. 더 솔직히 이야기하면, 아내보다 나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 하나로 모든 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이제 우리 가족은 평범함을 벗어나, 비범한 인생을 살아가 야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불편한 시선도 견뎌내고, 차별도 참아내야 한다. 막상 첫째 아이는 뭘 모르니 그냥 살겠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그것조차도 참으로 슬픈 일이다. 결혼하기 전에, 장애아를 둔 어머니의 인터뷰 내용에 이런 말이 있었다.


"이 아이가 나보다 하루 덜 사는 게 소원이에요. 

내가 죽으면 이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거든요."


 이 어머니의 말이 나의 마음이 될지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목사일을 하다 보면, 결혼식도 많이 가지만 장례식도 많이 간다. 입관 예식 때 가족들은 망자가 관에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 인사를 한다. 보통 자녀들이 먼저 떠나보낸 부모에게 이런저런 마지막 말을 한다. 만약에 우리 부부가 죽는다면, 첫째 아이를 남겨둔 채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까? 첫째 아이가 더듬거리는 말로 우리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장면을 생각만 해도 마음이 미어진다. 그렇다고 첫째 아이를 둘째 딸에게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둘째 아이는 언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희생하며 자란 아이이기 때문에, 우리 부부는 둘째 딸이 언니에 대한 부양의 부담을 갖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독립적으로 살아가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첫째 딸이 일찍 죽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 부부가 최대한 오래 살길 원한다. 우린 첫째 딸의 영원한 보호자 이자, 아빠와 엄마이기 때문이다. 험한 세상에 이 아이의 순수성 때문에 자신이 상처 받지 않고 살아가길 원한다. 그렇기에 난 오래 살아야 한다. 되도록이면 오래 첫째 딸의 방패이며 칼이고 싶다. 


"딸아. 넌 잘못 태어난 아이가 아니야. 넌 내 영원한 사랑이야."

"이유는 없어. 그냥 내 딸이니깐, 아빠가 사랑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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