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 필요한 건 잠금장치

by 물고기자리

“엄마!”

“엄마!”

“엄마!”

“엄마!”


두 아이가 번갈아 가며 엄마를 부른다. 노트북에 코를 박고 있는 나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척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끈질기게 엄마를 불러대고 결국 나는 방문을 걸어 잠그거나 소음의 원인을 없애러 방 밖으로 걸어나간다.


두 아이는 젖먹이 때의 기억이 남아 있어 그런지 먹을거리를 주는 사람을 귀신같이 알고 졸졸 따라다닌다. 신랑과 내가 둘 다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있어도 두 아이 모두 나에게만 악착같이 매달린다. 둘째 아이가 내 무릎 위로 기어올라 노트북을 두들겨대면 첫째 아이는 경쟁하듯 내 무릎을 차지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셋이 아닌 혼자의 몸으로 일하는 신랑을 보고 있으면 사랑이고 뭐고 그냥 덜 받는 쪽을 택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내가 대체로 방문을 걸어 잠그고 일하게 되는 이유다. 브루클린의 낡은 아파트 1층에 자리한 우리 집의 유일한 방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기분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지만 내 일이란 걸 하려면 달리 방법이 없다. 그나마 잠금장치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잠금장치가 없어서 내 한 몸 피할 곳이 화장실 밖에 없었던 전 집을 생각하면 이마저도 참으로 감사하다.


잠금장치의 중요성은 버지니아 울프도 설파한 적 있다. “자기만의 방과 1년에 500파운드의 수입과 방해받지 않을 시간이 있다면 여성도 멋진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라는 버지니아 울프의 유명한 말 앞에는 사실 "자물쇠로 잠글 수 있는"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당시에 여성을 방해하는 일이 얼마나 많았으면 버지니아 울프가 그러한 수식어를 같다 붙였을까. 슬픈 건 100년이 지난 지금을 살고 있는 나의 삶 역시 잠금장치라는 사물, 그때도 있었던 그 작은 사물에 내 삶의 많은 부분을 의존하며 살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정신은 대단한 면이 있다. 극한 상황이 닥치면 어딘가에 숨어 있던 인내심과 집중력이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다. 재잘대는 두 아이의 감시(?) 속에서 일을 해온 지난 6년의 시간 동안 나는 그걸 온몸으로 알아버렸다. 한 권의 책이 의뢰가 들어오고 적당한 조율 끝에 마감일이 정해지면 타자를 두드리는 나의 손이 빨라진다. 아이들의 소음은 저만치 무대 뒤로 멀어지고 다른 언어로 옮겨야 하는 눈 앞의 글에만 빨려들어간다면 좋겠지만 불행히도 영화에서와 같은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만 똥줄이 타버린 내가 스스로를 최적화할 뿐이다.


그리고, 그 최적화가 먹통일 때 나는 방으로 기어들어간다. 번역을 의뢰해준 클라이언트에게 미안한 마음 때문은 아니다. 내 이름을 달고 나오는 역서의 퀄리티를 사수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방으로 들어와 배에 힘을 딱 주고 노트북을 다시 펼친다. 하지만 아이들이 방 밖에 고스란히 있다는 것을 아는 상황에서, 혹은 내가 방 안에 있다는 것을 아이들이 아는 상황에서 내 일에 온전히 집중하기란 역시 쉽지 않다. 앨리스 먼로의 단편 <작업실>에 등장하는 주인공을 보아라. 그녀는 “방문이 닫혀 있고 그 방 안에 엄마가 있다는 걸 아이들이 안다고 생각해 보라.”라고 말하며 “간단하지만 뻔뻔해져야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남편에게 “아무래도 작업실을 얻어야겠어요.”라고 선언한 것이다. 물론 그렇게 구한 작업실을 또 다른 기이한 남자 때문에 떠나야 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그런 옵션을 택할 수 있었던 그녀가 나는 부럽다.


나 역시 작업실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는 민망하지만 집을 떠나 나만의 공간을 잠시 누려본 적이 있었다. 비록 독서실 한 칸 정도에 불과한 코워킹 공간이었지만 집에서 나와 그 공간에 발을 디디는 순간 뭔가 다른 차원으로 들어간 것만 같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다. 행여 시끄러울까봐 키보드를 살살 두드리는 동안 나는 독서실에서 공부하던 고등학교 때로, 아이들을 낳기 전 혼자 커피숍에서 일하던 때의 나로 돌아가 있었다.


그렇게 여덟 번의 일요일이 지났을까,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오롯이 내 작업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기적 같은 반나절의 시간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코로나 사태와 함께 연기처럼 흩어져 버렸고 나는 그 누구도 탓하지 못한 채 잠근 문 너머의 방으로 돌아와야 했다. <작업실>의 주인공 역시 마지못해 작업실을 정리해야 했을 때 나 같은 기분이었을까?


아이들이 잠긴 방문을 뒤흔들 때면 종종 그때가 생각난다. 두 아이가 만들어내는 소음이 온전히 차단된 곳에서 아이들의 존재조차 잊은 채 내 일에 빠졌던 얼마 간의 시간. 그런 날이면 소음에 비례해 커져가는 욕망을 살살 달래가며 창밖을 바라본다. 저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붙들어 가며.


오늘 밤만 자고 나면 혹은 두 밤만 자고 나면 확실히 오는 택배와는 달리 아무리 많은 밤을 자도 작업실이라는 공간이 내게 주어지는 날은 쉬이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감히 상상만 해본다. 언젠가 내게 누릴지도 모르는 그 공간을. 우선 큼직한 책상을 하나 놓을 것이다. 마음에 드는 탁상용 전등도 고르고 골라야지. 너무 많지도 너무 적지도 않은 책들이 꽂힌 책장을 들여놓고 프린터를 설치한 뒤 A4용지도 넉넉히 채워둘 거다. 아, 꽃병이나 화분도 하나쯤은 있으면 좋겠다.


어떤 하루는 이렇게 기약 없는 언젠가를 구체적으로 그려봐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만큼 버겁게 흘러간다. 내가 내 집에서 편안하게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은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는 때라는 자각이 유난히 크게 다가오는 날이다. 집에서 일하는 엄마의 모습을 뭉뚱그려서만 생각해 보았던 지난날의 나는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몰랐을까. 아니 그보다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않았을까. 알면서도 보려고 하지 않았던 어딘가에 지금의 내가 숨어 있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