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똑같은 하루

by 물고기자리

시간을 훔치는 몇 가지 방법을 알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섬뜩할 정도로 똑같은 하루를 보내는 거다. 나의 하루는 무서울 정도로 똑같이 흘러간다. 오늘을 복사해 내일에 갖다 붙여도 나도차도 알아채지 못할지도 모른다. 바뀌는 건 점심과 저녁 메뉴뿐. 그리고 다음 주에 찾아오는 마감 정도?


마감을 앞두면 마음이 바쁘다. 내일이 마감인데 오늘 애들이 아플 수도 있고 애들 때문에 내가 아플 수도 있다. 내가 자체 마감을 공식적인 마감 일주일 전으로 잡고 일하는 이유다. 그래야 무슨 일이 터져도 혹은 아이들 때문에 갑자기 일하기 싫어져 며칠을 건너 띄어도 마감에 맞춰 무사히 원고를 보낼 수 있다. 시간은 늘 부족하다. 그래서 항상 뒤로 밀리는 일이 많다. 돈이 되는 일을 우선으로 할 수밖에 없다 보니 언젠가 하자며 적어놓은 일들이 자꾸 쌓여만 간다.


번역가로서 나의 연봉은 16년 전 신입사원 때 받은 첫 연봉의 반도 되지 않는다. 이 돈을 벌자고 이렇게 아등바등하는 내가 제정신인지 나도 모르겠는 때가 찾아오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하루는 너무 훌쩍 가버린다. 나 잡아봐라 하며 조금도 봐주지 않고 앞만 보고 질주하는 하루의 꼬리를 쫒아 숨 가쁘게 달리다 보면 해질 무렵 폭삭 늙어버린 기분에 휩싸이곤 하는데, 이렇게 누적된 피로가 누군가의 말처럼 아이의 활짝 웃는 미소 속에 싹 달아난다거나 하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나의 하루는 첫째 아이가 유치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서는 8시 10분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둘째 아이의 밥을 챙겨주고 정신을 차리기 위해 샤워를 한 뒤 일을 시작하는데 그와 동시에 둘째는 TV 시청에 들어간다. 물론 아이는 TV 앞에만 앉아 있지 않고 엄마에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옹알이로 참견을 해대고 엄마 책상에도 한 번 기어올라 보고 하지만 나는 꿋꿋이 내 일을 한다. 아이 한 번 보고 웃어주고 다시 모니터를 째려본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오전이 다 가버린다. 점심을 먹고 첫째 아이를 데리러 갈 시간이다. 아이를 데리러 가는 20분 남짓한 시간 동안 내가 좋아하는 팟캐스트 <시스터후드>를 듣는다. 그녀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시 딴 세상에 나를 데려다 놓는다. 학교 앞에 도착해 격한 모녀의 상봉 시간을 갖은 뒤 아이의 손을 잡고 다시 20분을 걸어 집으로 오면 둘째 아이가 (대체로) 잠들어 있다. 그러면 나는 첫째 아이의 눈치를 보며 마저 일을 하거나 아이와 조금 놀아주다가 책을 보며 글을 쓴다.


물론 이 모든 일정은 신랑이 코로나로 집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시나리오다. 신랑이 출근할 때면 둘째 아이를 데리고 첫째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하는데 그건 참으로 번거로운 일이다. 돌아오는 길에 아이가 잠이 들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는데 그렇지 않은 날은 두 아이를 동시에 챙기느라 진이 빠진다. 게다가 첫째 아이가 학교에 갈 때에는 오전에 내 일에 집중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고 집에서 온라인 수업을 할 때면 아이 수업 챙기는 가운데 내 일 하랴, 엄마가 제 누나 옆에 앉아 있는 꼴을 못 보는 둘째 챙기랴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렇게 혼 빠질 듯한 하루가 저녁을 향해 달려갈 때쯤이면 나는 간단하게 요가를 한 뒤 저녁 준비를 한다. 다 함께 또 정신없는 식사를 하고 아이들을 씻기고 나면 기나긴 하루가 드디어 끝이 보인다. 양치까지 마치고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드디어 잠자리에 들 시간이다. 요새는 첫째 아이가 일찍 자기 때문에 아이를 재우고 나에게도 시간이 조금 생겨 이 시간을 이용해 책을 보거나 글을 쓴다.


주위 사람들은 묻는다. 어떻게 그 많은 일을 다 하냐고. 사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많은 일이 아니다. 우선순위를 잘 세워서 꾸준히 밀고 나가는 태도가 필요할 뿐이다.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건 대청소나 해도 눈에 띄지 않는 자질구리한 일들이다. 그런 일까지 다 하려고 들다가는 내 몸이 조금씩 소멸할지 모른다. 내가 잘하는 일 중 하나가 무리하지 않는 것이다. 나의 체력과 뼈나 근육의 상태를 나는 늘 예의 주시한다.


아이를 낳고 이석증이 꾸준히 재발한 이후부터 특히 내 몸을 잘 살핀다. 나도 모르게 골골대는 소리를 달고 살지는 않은지, 밤에 잘 때 일주일 내내 이를 갈지는 않는지, 간이 위치한 오른쪽 갈비뼈 부위가 묵직하지는 않은지. 내 몸상태에 늘 질문을 던진다. 그건 인정하기 싫지만 엄마로서의 의무감 때문이기도 하다. 엄마라는 역할이 지닌 무게감은 나를 속 편히 아프지도 못하게 만든다. 내가 아프면 우리 집에 도미노 같은 효과가 발생하리라는 사실이 나를 묵직하게 짓누른다.


가끔은 기나긴 휴가를 꿈꾼다. 해야만 하는 일로 꽉 찬 일상이 아닌 내가 좋아하는 일에 온전히 몰입하는 나른하고도 게으른 시간들로 꽉 채운 휴가. 읽고 싶었던 책을 하루 종일 읽고 보고 싶었던 드라마를 하루 종일 보고. 말은 이렇게 하지만 정작 휴가를 떠나면 아이들의 살덩이가 그리워 곧바로 돌아가겠다고 말할 것임을 알기에 영영 떠나지 못하고 있는 휴가다. 아이들이 조금 더 자라 나의 손길을 띄엄띄엄 필요로 할 때, 각자의 시간을 보낼 수 있을 때가 오면 나의 삶에도 작은 휴식 정도는 찾아올지 모르겠다. 그전까지는 주어진 하루의 틈새를 잘 비집어 나를 살릴 만한 일들을 심어놓는 수밖에.


오늘도 똑같이 보낸 하루의 끝에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쓴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어제와도 같고 내일과도 같을 이 하루 안에는 묘한 안도감이 있다. 지루해서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아주 가끔 찾아오기도 하지만 예측 가능한 하루는 대체로 만족감을 준다. 평범함이 주는 소중함 따위를 깨우쳐서 그런 건 아니다. 나는 어쩜 하루가 똑같이 흘러가는 게 좋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엄마가 되기 전부터 그랬는지 엄마가 되고 나서 바뀐 건지는 조금 더 생각해봐야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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