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소녀, 할머니와 공부하다

by 눙디

엄마는 주말을 제외하고, 평일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초등학교 3학년 외손녀의 공부를 봐주고 계신다.
스피커폰을 켜 두고, 엄마와 조카의 공부하는 시간이 시작되면 대략 50분가량 이어진다.
정확히 말하자면 공부 반, 수다 반이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부터 시작해, 화장실에 다녀오고 물을 마시는 핑계까지 조카는 어지간히도 공부가 하기 싫은 모양이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자주 웃곤 한다.

"공부하기 싫어." 그 말도 참 서슴없이 하지만 솔직해서 좋다.

거짓말을 못하는 것도 분명 장점 중의 하나일 것이다.


반면 태권도에는 열정이 넘친다.
태권도 국가대표가 꿈이라고 외치는 조카는 무더위 속에서도 땀을 뻘뻘 흘리며 매일 학원을 찾아 수련을 이어가고 있다.
발목이 약해서 얼마나 오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집중력과 끈기가 대단해서 그 꿈을 섣불리 말릴 수는 없다.
태권도 공연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는데, 매우 진지한 모습으로 무대를 채우는 조카를 보고는 대견스럽기까지 했다.


3, 4살 무렵, 조카의 손을 잡고 길을 걷던 기억이 생생하다.
사람들이 지나가다 멈춰 설 정도로 귀엽고 예뻤다.
연예기획사에서 캐스팅 제안을 받은 적도 있다고 한다.
사실 조카의 엄마, 그러니까 내 여동생도 어릴 때 정말 예뻤다.
하얀 피부에 커다란 눈, 오뚝한 코, 찰랑이는 생머리.

성인이 된 후에는 늘씬한 몸매와 큰 키까지 더해져 인기가 많았다.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외모가 많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그 예쁨은 남아있다.
모전여전이라는 말, 괜히 있는 말은 아닌 듯하다.


조카는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 살이 조금씩 붙더니, 어느 순간 '빵순이'가 되어 있었다.
'빵순이'라고 놀리면 천진하게 "헤헤헤" 하고 웃는다.
성격도 온순하고 늘 긍정적인 아이다.
태권도를 시작한 뒤엔 살이 자연스럽게 빠졌고, 요즘은 제법 날씬해졌다.


엄마가 조카를 가르치기 시작한 건, 학교에서 돌아와 학원을 가기 전 공백 시간 때문이었다.
함께 공부하는 과목은 국어, 수학, 사회.
국어는 지문을 읽고 내용을 이해하며 문해력을 기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조카는 말을 조리 있게 잘하는 편이라, 독서 습관만 잘 들인다면 앞으로 더 풍부하게 성장할 수 있을 것 같다.

수학은 세 자릿수 나누기 한 자릿수, 단위변환, 시간 계산, 도형까지 다양하다.
가끔 계산 실수가 있긴 하지만, 설명하면 금세 이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사회 시간에는 '요강', '맷돌' 같은 요즘 아이들에겐 낯선 단어를 배우는데, 이때 엄마의 옛날이야기가 더해지면 나도 옆에서 귀 기울이게 된다.
엄마는 정말 선생님이 되었어야 했다.
막힘없이 설명하고, 이해가 안 될 땐 다른 방식으로 풀어가는 모습을 보면, 엄마의 재능이 아깝게 느껴질 정도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면서 공부 시간은 오전과 오후로 나뉘었고, 짧아진 시간만큼 횟수는 늘어났다.
때로는 집중력이 떨어지고, "힘들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럴 땐 어린 나이에 많이 힘들겠구나 싶어, 괜히 안쓰럽기도 하다.
내 여동생은 중학교 시절 검사한 IQ가 140이 넘었다.
공부도 잘했고 이해력도 뛰어났던 여동생을 닮았다면, 분명 좋은 머리는 타고났을 터다.
문제는 공부하는 습관인데, 아직은 힘든 모양이다.


며칠 전, 밭에 가는 길에 조카를 데리고 갔다.
조카는 밭에 가는 걸 꽤나 좋아한다.
매해 딸기를 따고, 당근을 캐고, 콩을 따는 일도 "재밌다"며 쉬지 않고 움직이는 모습이 대견할 정도다.
이날도 들뜬 얼굴로 장갑을 끼고 신나 하는 모습이었다.


점심밥을 먹는 와중에 문득 조카가 말했다.
"나는 공부하는 것보다 일하는 게 좋아!"

나는 슬쩍 되물었다.
"에어컨 틀어놓고 시원한 방에서 공부하는 게 더 낫지 않아?"
"공부하려면 머리 써야 해서 아파."

그 말에 나는 조금 진지해졌다.
공부가 왜 중요한지, 왜 필요한지 설명해 줬지만, 조카는 "응, 알겠어."라며 힘없는 반응만 보였다.
그 말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나는 작전을 바꾸기로 했다.


"○○아, 바닥에 골라놓은 고추 보이지? 바구니에 옮겨 담아줄래?"
조카는 금세 "좋아!" 하고 일어나 바쁘게 움직였다.
얼마 후 더운 기색이 역력해 쉬겠다고 하길래, 시원한 물에 복숭아와 복분자까지 챙겨줬다.

그리고 살짝 장난기 섞인 말투로 한마디 했다.
"우리 ○○이는 일을 좋아해서 정말 다행이다. 파이팅!"

날은 덥고, 앉았다 일어섰다 반복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을 텐데, '일이 좋다'라고 말해버린 탓에 끝까지 군소리 없이 열심히 하는 모습이었다.


시킨 일을 마치고 그늘 아래 의자에 앉자마자 조카는 엄마를 바라보며 묻지도 않은 한마디를 했다.

"할머니, 일하는 것보다 할머니랑 공부하는 게 좋아요."

엄마와 아빠, 그리고 나는 한참을 웃었고, 조카도 수줍게 웃었다.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자라날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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