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문지

by 눙디

고등학교시절.

담임선생님은 조례 시간에 학교폭력 실태조사 설문지를 나눠주셨다.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당한 학생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한 설문이었다.


그 당시 우리 교실에서는 점심시간마다 폭언과 폭행이 일상이었다.

소위 '노는' 학생들이 자신들 마음에 들지 않는 학생들을 점심시간마다 교실로 불러내 찬 바닥에 무릎 꿇게 하고, 손으로 머리를 때리고, 발로 차고, 욕을 했다.

심지어는 "왜 그렇게 생겼냐"며 외모를 비하하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나는 그 설문지를 받아 들고,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고 적었다.

덧붙이지도, 감추지도 않고 그 가해 학생들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적어 제출했다.


몇 시간이 흐른 뒤, 담임선생님이 나를 교무실로 부르셨다.

'좀 더 자세한 상황을 들으시려는 건가?' 생각하며 교무실에 들어섰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선생님은 날 매섭게 바라보며 내가 작성한 설문지를 꺼내 내미셨다.

"설문지를 이런 식으로 쓰면 어떻게 해?"

나는 어리둥절했다. 물음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네? 저는 사실대로 쓴 건데요?"

"이 설문은 경찰서에서 주관한 거야. 이게 넘어가면, 여기에 이름 적힌 애들이 전부 조사를 받아야 해."

나는 다시 대답했다.

"잘못했으면 당연히 조사를 받아야죠. 가해자인데요."

솔직했지만, 나는 당찬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선생님은 더 화가 난 듯 말씀하셨다.

"같은 반 친구한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가해자'라니!"

나는 선생님의 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왜 내가 혼나야 하는지, 왜 내가 잘못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눈물이 났다.

"선생님이 혼내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걔네들이에요. 왜 저한테 이러세요."

울먹이며 말했고, 교무실 안엔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날 오후, 나는 또 한 번 선생님의 호출을 받았다.

이번에는 내가 지목했던 학생들을 모두 불러놓은 상태였다.

선생님은 "너희들끼리 이야기 좀 나눠봐"라고 하시며 우리만 남겨두고 자리를 비우셨다.

제보자를 가해자에게 노출시키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지만, 그때는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가해 학생들은 나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미안하다"라고 말했다.

당황스러웠다.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왜 나에게?'

이어지는 말은 더 당황스러웠다.

"설문지 다시 써줄 수 없어?"

그 순간, 또 한 명이 말했다.

"내가 너한테 무릎 꿇고 사과하면, 그렇게 해줄 수 있어?"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너희가 나한테 사과할 일이 아닌 것 같아. 그리고 설문지를 다시 쓰는 일은 없어."

그렇게 말하고 그 자리를 나왔다.


그 이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가해 학생들이 경찰 조사를 받는 일도, 점심시간마다 반복되던 그 심각한 상황도.

단지, 그들이 나를 쳐다보는 눈빛과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만 남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로 몇 년이 흘렀고, 우연히 선생님을 마주하게 되는 날이 찾아왔다.

선생님은 의외로 반갑게 나를 맞아주셨고, 약속도 없이 만나 세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오랫동안 묵혀 두었던 그날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궁금했던 질문을 했다.

"선생님, 그때 왜 저를 혼내셨어요?"

"그 학생들은, 누군가가 옆에서 붙들어줘야 했어. 위태로워 보였던 학생들이었기에, 선생님이라도 품어줘야 했다고 생각했어."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반쯤은 이해했고, 반쯤은 이해하지 못했다.


시간이 더 흘러, 나 역시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보니 이해하지 못했던 절반을 이해하게 되는 날이 오고 말았다.

문제없는 학생들보다 문제가 있는 학생들에게 더 눈길이 가고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는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담임으로서, 보호자의 마음으로 학생들을 감싸줘야 하는 일이 많다는 것을.


그 시절 피해자였던 친구 중 한 명과는 여전히 연락하며 지내고 있다.

어느 날 나는 그 친구에게 물었다.

"왜 그때 아무 말도 안 했어? 왜 맞으면서도 가만히 있었어?"

그 친구는 말했다.

"그 애들은 다수고, 나는 혼자였으니까."

그 말을 하며 조심스럽게 이어가던 표정과 떨리는 목소리에서, 그 시절이 여전히 트라우마로 남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내 친구는 내가 그때 겪었던 일들을 모른다.

물론 나도 그 이야기들을 꺼내지 않았다.


교실에서 폭언과 폭행이 난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지금도 어디선가, 혼자라고 느끼며 두려워하고 있을 피해학생들에게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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