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ne Inch Nails - The Fragile
Nine Inch Nails의 프론트맨이자 실질적인 본체라 할 수 있는 트렌트 레즈너는 모든 아티스트들이 선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래미와 아카데미, 골든 글로브상, 에미상 등을 수상하여 음악계와 영화계, TV 등 문화계 전반에서 최고의 성취를 이룬 바 있고, 우스갯소리로 이제 토니상만 수상하면 올클리어라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등 거의 문화계의 위인에 가까운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가 손대는 프로젝트 중에는 거의 실패가 없고, 그가 발매한 앨범 중에 Nine Inch Nails의 데뷔앨범인 'Pretty Hate Machine'부터 최근의 여러 프로젝트 및 OST 음반까지 좋은 평을 받지 못한 결과물을 찾기가 힘들 정도이니 활동 초기부터 지금까지 거의 그를 가로막은 문제도 없었고, 딱히 벽에 부딪힌 적도 없을 듯하다.
그러나 90년대 후반 그는 커리어적으로는 몰라도 인생에 있어서는 최악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고 한다. 초반의 락스타 인생은 그를 약물중독으로 몰아갔고, 일찍 찾아온 성공은 이후의 음악 활동에 무거운 압박을 안겨주었으며, 함께 활동하던 밴드 멤버들의 잦은 교체와 탈퇴 역시 스트레스를 가중시켰을 것이다. 결국 그는 3집 정규앨범 'The Fragile'의 준비를 구실로 해변가의 외딴집에 혼자 틀어박혔는데, 이때 실제로는 음악 작업은 핑계였을 뿐, 사실은 자살 기도를 생각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피아노 앞에 앉아서 조용히 음악에 몰두하던 중 어떠한 선율이 머릿속에 떠올랐고, 그렇게 만들어진 곡은 'La Mer'라는 트랙으로, 그 노래를 바탕으로 그는 Nine Inch Nails의 앨범 중 최고 명작으로 꼽히는 'The Fragile'을 완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략 10년 전쯤에 저는 스스로 해변가의 외딴집에 틀어박혀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음악 작업을 하고 있다고 주변에 이야기하고, 실제로 거기에서 만든 곡 중 일부가 'The Fragile'에 수록되기는 했지만... 실상은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혼자 있던 시간 동안, 딱 한 곡을 쓸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곡을 연주할 때면 기분이 꽤 이상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곡은 제 인생에서 꽤나 어둡고 끔찍했던 시기로 저를 돌아가게 만들기 때문이죠. 지금 제 인생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생각해 보면 신기하기도 합니다. 전 아직 살아있고, 거기로 돌아가는 것이 이제는 두렵기도 하지만, 다시 돌아가려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제 아내와 결혼할 거예요." [2009년 Mansfield에서 열린 공연에서 'La Mer'라는 곡에 대해 설명하는 트렌트 레즈너의 멘트]
초창기 끔찍하게 잔인하고 기괴한 뮤직비디오와 우울한 가사, 굉음에 가까운 사운드로 악명 높았던 Nine Inch Nails를 생각하면, 트렌트 레즈너가 지금에 와서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사운드트랙을 작업한다는 사실이 다소 놀랍다. 하지만 그가 작업한 애니메이션이 다른 작품이 아니라 픽사의 'Soul'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납득이 가기도 한다. 그가 'The Fragile'의 작업을 진행하면서 얻은 경험과 깨달음은 영화 'Soul'의 메시지와 통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 'Soul'은 재즈 피아니스트를 꿈꾸지만 실제로는 학교의 강사로 겨우 입에 풀칠하고 있던 주인공이 꿈에 그리던 공연 자리를 따낸 직후, 불의의 사고로 갑자기 사망하여 억울함에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가려고 하는 절박한 과정에 대한 스토리를 다루고 있다. 그 와중에 그는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영혼 22와 조우하게 되고, 세상에 태어나는 것 자체가 귀찮은 22와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의지가 충만한 그가 서로의 목적을 위해 협력하기도 하고 서로 티격태격하기도 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이런 시놉시스를 보면 영화의 메시지는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꿈과 성취가 가지는 중요성과 희망'에 대한 것일 듯하지만, 의외로 'Soul'의 메시지는 이보다 심플하다. 그냥 '살아있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고 괜찮은 일이다'라는 것이 그 핵심 주제이다.
극 후반부에 주인공 조 가드너는 피아노를 연주하며 자신의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에 빠지게 되는데, 그가 여태껏 가치 없다고 여겼던 인생의 소소한 순간들이 하나하나 얼마나 중요했고 소중했는지에 대한 강렬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의 이런 모습이 바로 'La Mer'라는 곡을 쓰며 다시금 삶의 의지를 회복했던 트렌트 레즈너와 겹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러한 접점이, 그간 다소 차갑고 어두운 정서의 곡들을 쓰던 트렌트 레즈너가 평소의 영역에서 벗어나 온 가족이 볼 수 있는 따뜻한 작품에 어울리는 곡들을 쓸 수 있게 만들어주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 따뜻한 정서와 삶의 충만한 의지와는 다르게, 사실 'The Fragile'은 굉장히 어둡고 날카로우며, 심하게는 암울하기까지 한 앨범이다. 시작하자마자 혼돈 그 자체의 느낌을 주는 'Somewhat Damaged'로 시작하여 트랙 이름 그대로 진짜로 망해가는 세상을 그려내는 듯한 트랙 'The Day the World Went Away'를 비롯해서 절규에 가까운 창법과 몰아치는 비트가 인상적인 'We're in This Together Now', 강한 분노가 느껴지는 곡 'Starfuckers Inc.' 등 방대한 분량 내내 쫄깃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전개가 지속적으로 유지된다. 게다가 타 록 장르의 앨범에 비해 극단적으로 차가운 느낌을 주는 인더스트리얼 사운드 역시 그 명성에 비해 이 앨범의 진입 장벽을 다소 높이는 구석이 있다.
극단적으로 어둡고 차가운 기운을 내뿜고 있는 음반이지만, 'The Fragile'에는 트렌트 레즈너의 새로운 삶에 대한 의지가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이 앨범을 평범한 인더스트리얼 록 음반의 평균 선을 훨씬 넘어서는 명반으로 끌어올려주는 원동력이 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