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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인 Aug 10. 2024

행운

긴 날숨으로

남편이 라만(Raman)으로부터 법문 번역요청을 받은 것은 대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캠퍼스를 걸어가면 십 년이라는 나이 차이를 알지 못하는 여학생들의 깜찍한 윙크세례를 자신의 매력에 반한 증거임을 주장하던 남편의 리즈시절이다. 우연히 미얀마 스님들과 대만 사람들이 참석했던 인터내셔널 명상코스를 하게 되었고, 이러한 상황이 참석한 세 사람을 어쭙잖은 한국 대표로 만들어 버렸다. 그 코스에서 우리가 뿌네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한 라만이 남편을 찾았다. 남편의 늦은 캠퍼스의 낭만을 만끽하던 어느 날, 지금은 태국의 아잔 차 전통으로 출가한 한 친구의 안내로 그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당시 그는 정신과 의사로서 고엥까 선생님의 비서로 칠 년째 담마기리에서 봉사하고 있었다.

     

그때는 이미 많은 서양인들이 인도에서 명상을 배우고 자신들이 나라로 돌아가 백여 개의 명상센터를 짓고 담마를 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랜 전통의 불교문화가 살아 있는 우리나라에 아직 명상코스가 열리고 있지 않았다. 그와의 첫 만남에 번역을 제안받았고, 일 년 동안의 번역 후 녹음까지 하게 되었다. 이전에도 명상코스를 하고 간 소수의 한국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하게 된 것이다.

     

행운처럼 주어진 봉사의 기회는 명상하는 사람들 간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었던 뿌네 사람들과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명상하는 사람들의 큰형 같았던 바라뜨 바이(Bharat Bhai), 어제 만났던 그를 이튿날 아침 심장마비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황망함을 잊을 수 없다. 그의 장례식에 구름 떼 같이 모였던 지인들 보며 그렇게 보내야 하는 아쉬움이 더 하기만 했다. 키다리 아저씨 같았던 로히(Rohi)의 몇 가닥의 곱슬머리가 자연스럽게 흘려져 내려와 있는 조각상 같은 얼굴을 보며 심쿵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는 라만의 후임 비서로 헌신적으로 봉사했던 내과의사이다.

      

가톨릭 사제로서 명상코스를 지도하고 있었던 피터(Peter) 신부님과 서양의학을 공부하고 아유르베딕 처방을 하는 자상한 내과의사 니킬지(Nikhilji), 단아하고 후덕한 현모양처의 전형 같은 수미지(Sumiji), 은행을 퇴직하고 싱글의 삶을 즐기고 있는 다정한 아라띠지(Aratiji), 예술 같은 음식 솜씨의 부인을 자랑스러워하는 작땁지(Jahtapji), 소아과와 산부인과 의사 부부  간라지(Ganlaji)와 니르말라지(Nirmalaji)  등 삶 속에서 수행하는 선배들과의 만남은 누구나 누릴 수 없는 혜택으로 느껴졌다. 사회적 책임과 각각의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도 명상을 할 수 있는 그들의 사회적 환경이 부러웠다.

      

70년대부터 초기제자 그룹을 형성했던 서양인들 중 케이트(Kait)와 베리(Berry) 커플로부터 명상을 지도할 수 있는 트레이닝을 받을 수 있었던 것 또한 행운이었다. 후광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두 커플은 메사츄세스에 미국 최초의 위빳사나 명상 센터를 만들고 지도하면서 매년 12월이면 장기코스에 참석하기 위해 인도에 왔다. 그들의 지도와 안내를 받으며 차오르던 그때의 기쁜 마음은 몰랐다. 더 고요한 평온을 계발해야 하는 계기가 주어지는 것임을 알지 못했다. 깊고 푸른 눈으로 미소 짓는 케이트를 보며 정신세계만큼은 유구한 수행전통의 동양인들이, 아니 한국인들이 앞서 있을 것이라는 나의 편견과 자존심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봉사란 타인을 돕기 위한 이타의 행위이다. 하지만 알아주던 알아주지 않던 봉사 할 수 있는 기회를 누리고 선업을 쌓는 것은 나 자신이다. 빠라미(parami)란 복을 짓는 덕스런 행위가 쌓여 축적되는 것을 말한다. 선업을 짓겠다는 의지가 집착으로 전락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선한 행위의 결과로써의 과보를 누릴 수는 있겠지만, 선업을 쌓겠다는 마음 또한 불러일으킨 마음이다. 반대의 마음 또한 불러일으킨 마음이라는 것은 똑같다. 불러일으킨 마음이란 의지나 의도에 가깝다. 따라서 수행의 길에 있어서 봉사가 마음을 정화하는 길이 되지 못한다면 욕망을 만족시키는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수행에 있어서 선업이 우리를 보호하는 호신으로 작용하겠지만, 관건은 갈망과 혐오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봉사가 수행의 다른 방편이었음을 알게 되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고통과 아픔을 공유하고 공감하면서 명상의 달콤함을 나누려는 노력 곧 그 자체가 나 자신을 지켜보며 점검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수행법에 대한 의구심과 불만족, 불안으로 동요하기도 한다. 명상을 하면 좋은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가 무너지면서, 외면했거나 억압했던 무의식의 층위들이 드러난다. 마음의 정화 과정 중 표면에 먼저 떠오르는 분노와 슬픔, 수치심, 억울함 등은 마음의 불순물이다. 이러한 마음의 내용물을 마주하는 그 자체가 명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혼란은 아무 말 대잔치가 되기 쉽다. 판단을 중지하고 투명한 마음으로 명상의 테크닉을 설명하려는 노력의 지속은 에너지를 고갈시키기도 한다. 때로 지친 이성이 감정에 휘둘리기도 하지만 선업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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