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연애 사랑주의를 외치게 된 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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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렘이 무서워진 건 아마 작년의 연애 이후였을 거다. 섭섭함에 곧잘 울던 그녀와, 어쩔 줄 몰라하며 답답함을 느끼던 내가 나중을 기약하게 된 건, 햇빛이 몸에 적셔지는 7월 오후쯤이었다. 평소에도 곧잘 울던 그녀는 그 당시에도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아니 웃고 있었던가. 내가 챙겨온 오렌지를 돗자리 위에 던져놓은 채였다.
-나는 더운 날이면 꼭 오렌지를 먹어
원래 나는 조금만 힘을 주면 맨 살을 드러내는 오렌지는 한심해보여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가 들었던 그녀의 말에 오렌지를 싸갔던 것이다.
-너는 우리 사이 어떻게 생각해
천호대교 아래로 흐르는 물결을 바라보며 내뱉은 말에, 그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걸까. 그녀는 그 좋아하던 오렌지를 혐오스럽게 바라보며 내팽겨쳤다. 그게 끝이었다. 서로를 보는 게 아닌, 불쌍한 오렌지를 쳐다보며 아무 말 않던 그 순간이.
생각해보면, 아메카지풍 옷을 즐겨 입던 내가 말끔한 셔츠라도 입고 오는 날에는, “승현아, 승현아”하며 사랑스러운 표정을 짓던 그녀는 마음 표현을 곧잘 하는 편이었다. 연애의 시작도 그녀의 역할이 컸다. 우린 면접장에서 처음 만났다. 처음엔 그녀와 나는 서로에게 별다른 시선을 주지 않았다. 둘 다 서로에게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럴 만한 여유도 없거니와 정말 단 한 순간이었으니까. 그렇게 둘은 같은 회사를 다니게 되었다. 얼굴을 처음 제대로 마주치게 된 건 동기끼리 떠난 피크닉 때였다. 장소는 뚝섬 근처 카페였다. 사실 피크닉이라고 하기도 뭐한 것이, 다섯 사람이서 모여 각자 노트북을 두드리다가 밥을 먹고 노래방을 간 게 다였다.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에 그녀는 어렴풋이 내게 좋아한다는 말을 건넸다. 내가 다른 사람의 짓궂은 농담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쳤을 때였나, “내가 이래서 승현이가 좋아.”라는 말을 던졌었다. 그때 당시에는 별다른 느낌이 없었지만 이후, 둘이서만 만나는 시간이 늘게 되면서 자연스레 그녀의 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고서 한 다섯 번째 만남 즈음에, 처음 손을 잡았다. 그 동안 둘이 술도 마시고 자전거도 타고 남양주에 드라이브까지 가면서도 스킨십은 전무했는데 말이다. 서로는 서로에게 그동안 쌓아온 마음을 전부 털어놓았고, 상대방에 대한 마음이 크지 않았음에도 그녀의 직선적인 표현에 설렘을 느낀 나는 금방 맨 마음을 건네주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연애는 눈빛과 땀의 교환을 통해 무르익는 듯이 보였지만, 끝맛은 결국 허수였다. 나는 내 마음이 온전히 쏟아지는 것 같지 않아, 웃었고, 미안해했고, 힘들어하는 그녀를 달래며 내일 해결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웃으려고 사랑한 건 아니었는데, 우리 둘은 웃지 않으면 죄인이 되곤 했다. 우린 간수 없는 교도소에서, 둘 만의 세상이 있음에 짜릿해하며 동시에 괴로워했다. 나는 상대방의 마음에 보답해주지 못하는 것 같다는 자괴감에, 상대방은 기대보다 못한 내 모습에 말이다. 둘 다 그 상황을 감수할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그녀와 나는 좀 더 나은 환경을 원했다. 어느새 외부환경이 된 서로는 서로에게 만족스럽지 못했으니까.
그때부터 나는 비연애 사랑주의를 외치게 되었다. 뭐, 원나잇을 추구한다거나 하는 얘기가 아니라, 굳이 연애를 하지 않더라도 주변 사람과 사랑을 나누는 일은 가능했기 때문이다. 매일 타는 버스 기사분께 인사를 건네거나, 단골집 사장님께 좋아하는 간식을 건네드린다거나 하는 일은 삶의 동력을 얻기에 충분했다. 더 이상 자괴감이나 불만족에 빠지지 않고,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얼마 전 읽은 “계절이 내가 될 때”라는 시집에도 주변 사람과의 애정을 예찬한 시가 있었다.
-우리 모두는 각자 모험을 떠났었어. 난파된 배를 부여잡고 겨우겨우 이 곳에 왔지. 사랑이란 걸 처음 배운 우리 동네로 말이야. 설렘의 태동을 언제 다시 느낄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아픈 배 부여잡고 당신들과의 추억을 즐길래. 뜨거운 눈빛에서 느끼던 설렘이 일상이 되고, 다른 이의 몸 위에 땀 흘리던 순간이 한낱 바람이 될 때까지.
함께 모험을 떠났었던 이국의 사람들은 심해에서 입을 뻐끔거리고 있다. 태풍에 의해, 해적에 의해, 그리고 서로간의 싸움으로 인해 부셔진 여정에서 죽어난 사람들이 여전히 노을 아래 숨어있다. 오렌지를 좋아하던 그녀와의 기억도 추억이 되겠지만, 난 더 이상 오렌지는 먹지 않기로 했다. 새로운 기억을 만들기 위해선 망각도 필요할뿐더러, 무엇보다 마트까지 가는 길이 너무 멀기 때문이다. 아픔이 두려워 설렘마저 무서워하는 게 지질해보일 수도 있지만, 이것도 나름의 사랑 방식이다. 이성을 이성으로 보지 않기 시작하면, 오히려 사람으로서의 매력이 더 잘 보일테니까. 그러니까 나는 동네 편의점에 가서 아이스크림이나 사 먹으련다. 오렌지만큼이나 이것도 꽤나 달고 중독적이니까. 잠깐의 설렘만큼이나 현실적 애정도 꽤나 달고 중독적이니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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