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자기만족과 의도된 시간
현수는 5라는 숫자를 가리키고 있는 초침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일상적으로 드나 다니는 상계역 4번 출구 앞에는 거대한 시계가 있었다. 5시 55분을 가리키고 있는 채로 저 혼자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마냥 멈춰있었다.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지하철 출구 앞에서, 현수는 눈앞의 시계와 사선으로 연결된 듯, 부동자세로 한참을 서 있었다. 현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지인이라면, 이러한 현수의 행동을 보고는 진작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챘을 테다. 왜냐면 원래 현수는 출퇴근길에 항상 다른 사람의 모습을 눈여겨보는 편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퇴근길에 다른 사람들은 무얼 목적으로 걸음을 하고 있는지, 어떤 표정으로 그 목적을 위한 행동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모습의 사람들이 있는지 등을 관찰하곤 했다. 그것은 현수에게 있어, 일종의 직업병이었다. 현수는 데이터 분석가였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제품 이용자들의 데이터를 분석하여 시각화하고, 이를 통해 다음 행동을 예측하여 전략을 짜는 일을 중점으로 했다. 그리고 오늘도, 사람들에게 일상의 활력을 선사해준다는 B사 영양제의 흑자 이유에 대해 분석하고 나온 길이었다.
-이거 따로 분석할 게 없겠는데요? 기존 헬스케어 업계의 주요 고객층인 4~50대를 넘어서 오히려 2~30대 젊은 층에게 주목받고 있어요. 네 달 전만 해도 4~50대에게만 업계 평균 정도로 팔리던 영양제였는데, 금방 입소문을 타고 확산되고 있잖아요. 아, sns 소문 이라고 해야 되나요?
현수의 부사수는 굳이 돈을 주면서까지, 뻔히 보이는 흑자 이유를 분석해달라는 A사의 요청을 이해 못 했다는 듯 말했다.
-B사의 경쟁사인 A사가 요청했다는 점을 봐야지. 여기 임상 결과도 같이 보내줬잖아. 영양제에 문제가 있음에도 잘 팔리는 이유에 대해 알고 싶다는 거지
-그래요? 뭐 선배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그럼 저는 뭘 하면 될까요?
부사수의 질문에, 현수는 일단 쉬고 있으라는 말을 뒤로한 채 생각에 잠겼다. A사가 보내준 B사 영양제의 임상 결과로는 흥행의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반대의 결과가 나왔어야 할 터였다.
<흥분과 불안 촉진과 같은 부작용 없이 카페인의 100배에 달하는 각성효과를 줄 수 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사용한다면, pseudodementia와 같은 증상을 유발할 수 있다.>
단기적인 부작용은 없지만, 추후 우울증과 동반한 심리적 치매 증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현수의 판단과는 다르게 나타나고 있었다. 단기적인 부작용 없이 각성 효과를 준다는 영양제의 존재는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었고, 한 번쯤은 시도해보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전문의약품이 아니기 때문에 안심한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이후 놀라운 효과를 겪은 사용자들은 영양제에 극도로 호감을 느껴 온갖 긍정적인 후기를 남겼고, 이는 sns 상으로 트렌드가 된 상태였다. 데이터 상으로 보면 그러했다. 사회적으로 보면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요즘의 사람들은 인터넷과 스마트폰이라는 매력적 도구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래서 타인의 조언과 관습에 둘러싸여 모든 것을 공유 받았고, 그들의 취향은 쉽게 일관화되었다. 그리고 B사는 그 점을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당장은 부작용을 겪을 일이 없으니 단기적인 효과로 사람들을 현혹시킨 것이다.
-주민아, 이거 내가 다 끝냈으니까 넌 그냥 보고만 하고 퇴근해
이상의 분석 결과들을 문서화한 현수가 부사수인 주민이에게 마무리를 맡겼다.
-저 시켜달라니까요 선배님... 알겠습니다. 마무리 잘 해놓겠습니다!
그날의 퇴근길은 그렇게 시작되었었다. 건물과 사람으로 꽉 차, 멀리 바라볼 수 없는 서울, 그 안에서 현수는 거울로만 자신의 모습을 정돈할 수 있었다. 인간관계를 이어간다고 마셔댄 술로 인해 툭 튀어나온 배와, 직장인이라면 매야 하는 넥타이와 정장, 그리고 옆으로 대충 둘러맨 브리프케이스와 스타벅스 커피를 들고, 현수는 그런 모습으로 서 있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커피라면 도시적 분위기를 풍기는 스타벅스여야 했고, 구두는 이탈리아제여야 한다며 굳이 좋아하지도 않는 여행을 갔을 때 면세점에서 샀던 페라가모 구두, 은밀한 부위를 지켜주는 팬티도 “기왕이면...” 이란 마음으로 기능성 팬티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현수는 그런 자신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빠졌다. 갈 곳 잃은 두 눈빛은 그런 현수가 좀비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러한 모습으로, 현수는 온갖 상념에 빠진 채로 상계역에 도착한 것이었다. 그날따라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는 건 더 이상 의미가 없어 보였고, 누군가가 부여했을 시간의 의미도 현수에게는 허황되게 느껴졌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상계역 4번 출구 앞 건물의 벽면에 부착돼있던 5시 55분의 시계, 현수는 홀로 존재하고 있는 그 시계를 홀연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