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심을 꾸려내어 완성품으로 만들어 내기까지는 생각보다 많은 조미료가 들어간다. 개인적인 욕구부터 현실적인 제한까지, 하고자 하는 목적, 해야 되는 이유,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그리고 하게 되면 얻게 될 장단점 등이 어떤 맛을 자아낼까 하는 궁금증을 뒤로하고 배어진다. 이러한 과정은 어린아이가 첫 발을 내딛을 때의 쾌감처럼, 그런 아이를 보는 부모의 해방감처럼 단발적인 혼란과 쾌감을 역설적으로 자아낸다. 단발적인 쾌감은 결실을 맺기까지의 고통으로 결부된다. 특히 그러한 감정의 유동이 가장 클 때는 다른 사람과 팀을 꾸려 일할 때이다.
재작년 여름, 전공하고 있는 분야의 협회에서 포럼을 개최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발표회를 열었고, 나는 좋은 경험이 될 거라는 생각에 약간의 조미질 후 바로 뛰어들었다. 교대의 한 카페에서 첫 만남을 가졌는데, 자줏빛 벽면에 얼굴을 바라보기엔 적당하지만 책을 읽기에는 어두운 밝기의 조명, 그리고 좁은 간격의 테이블이 있는 카페였다. 그때의 풍경은 2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그만큼 나는 첫 시작에 많은 공을 들이는 편이다.)
자줏빛의 벽면이 팀원들의 얼굴에 겹쳐 몽환적인 분위기를 겹쳐낼 때쯤, 우리는 팀장을 정하기로 했다. 학과 내 인원이 참가하는 학술제 개념이라서 그 자리엔 3학년 선배 둘, 2학년 복학생인 나, 그리고 저 학번 2학년 둘이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3학년이 팀장을 맡는 것이 좋지만, 왠지 모를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올해는 2학년이 팀장을 맡았으면 좋겠다는 전언을 들었다. 그때 나는 아마 복학 뽕에 빠져 온갖 열정으로 둘러 쌓여 있었던 때일 거다. 사실 열정이라고 부르기에는 뭐한 치기 어린 자신감뿐이었겠지만, 충분히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판단해 자진해서 팀장을 맡았다. 지금 와서야 하는 소리지만, 충분한 지식과 경험 없이 맡은 팀장 자리는 잘못 산 신발을 사서 신었을 때처럼 불편했다. 분명, 신발의 빈 공간을 채우느라 억지로 꾸겨 넣은 남의 지식과 아이디어들은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를 만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나의 비틀거림에 몸을 부딪힌 팀원들이 불평하는 소리가 음성이 없음에도 선명히 들렸으니까.
이런 류의 결정은 날 것의 결심이다. 충분한 조미가 되지 않은 채 단발적인 쾌감에 빠져 성급히 정하고야 마는 그런 속성의 결과물이다.
-승현아, 네가 좀 결정해서 해봐
계속되는 질문과 도움 요청을 받아주던 3학년 선배는, 팀장인 내가 스스로 방향을 결정해나가길 바라셨다. 하지만 치기 어린 자신감만 존재하던 나는 야생성을 잃어버린 사자처럼 던져지는 먹이를 받아먹는 게 아니고선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진취적 소심이인 내가 준비 없이 마음만 앞섰을 때 얻게 되는 후폭풍이다. 성취하고 싶은 목표는 있지만 남의 눈치를 꽤나 많이 봐서, 내 지식이나 경험이 없으면 수동적으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존재가 된다. 마치 로프 없이 암벽에 던져진 어린아이 같다. 그나마 열심히 공부해서 길을 잡아도, 남의 의견에 쉽게 흔들린다. 결국 준비기간 동안 여섯 번이나 기획안을 뒤집고서야 발표를 할 수 있었다. 그마저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따지고 보면, 준비 없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하는 당연한 사실이 적용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을 믿으며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확고히 정한 후 나아가는 사람과 시작해놓고서 이게 맞나 하는 고민을 주로 하는 사람은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자신만의 흐름이 존재하는가의 여부는 결과물을 내는 데 있어 생각보다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진취적이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쌓인 실패 경험과 추진력이 작용하여, 결국 해내는 일도 많기 때문이다. 자신 없는 일에는 여지없이 소심함이 작동하지만, 그 안에 사소한 한 면이라도 확신을 얻으면 소심함 따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점을 하나씩 찍어 나가다 보면, 비록 모든 점이 선으로 이어지지는 않겠지만, 선을 통해 만들어진 도형 안에 점들이 알알이 박혀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결국 현재 내가 기거하는 도형은 나의 진취성과 소심함이 만들어낸 작품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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