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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상품 Mar 15. 2020

나는 모든 추잡스러운 것들과 이별한다

현실에 대한 외면과 집착에 대해

-징글징글해


 기연은 버스 앞좌석을 내리치며 읊조렸다. 동시에 개념 없는 자신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앞좌석에 앉은 사람은 없었지만 공공장소에서 화를 참지 못했다는 것은 그녀의 수치심을 극대화했다. 그녀는 또 비겁한 짓을 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녀의 남자친구는 기연이 자신을 물어뜯고 할퀴길 바랐지만,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지느러미를 뜯어내어 가라앉기를 택했다. 비겁한 회피, 치졸하고 공허한 변명으로 칠해진 자신을 더는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급하게 하차벨을 가까운 정류장에 내려버렸다. 집 앞 정류장을 두 정거장 남겨둔 곳이었다. 택시를 타긴 애매한, 그렇다고 버스를 다시 탈 바엔 걸어가는 것이 낫겠다할 거리. 걷겠다 마음먹던 찰나 그녀는 유독 또각 거리는 높은 힐이 원망스러웠다. 오늘따라 신발장에 처박아둔 힐이 눈에 들어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기연은 굽이 닳든 말든 무거운 다리를 질질 끌며 걸었다. 


-징글징글해

 그녀는 횡격막이 내려 앉아 올라오지 않는 먹먹함에 깊은 한숨을 연이어 내쉬었다. 폐가 젖은 한지에 감싸져 숨을 쉬어도 쉬어지지 않는 답답함. 기연은 가슴을 툭툭 치며 현관문을 열자마자 침대에 몸을 툭 떨어뜨렸다. 


.


문득 시끄러운 소리에 기연은 눈을 떴다. 전화벨 소리, 해진이었다.

-어, 왜

--잤냐

-졸았어

--쫌 어때

 딱딱하게, 속은 부드럽게. 해진은 그런 친구였다. 어떠냐는 물음이 며칠째 해진의 입에서 기연의 귀로 가슴으로 흘러갔다. 그녀는 폐에 붙은 한지쪼가리가 떨어져 나감을 느꼈다. 어떤 시련에 대한 절절한 공감도, 냉혹한 조언도 없이 일상을 정리하는 기분. 일상의 잔인함은 잊고 그저 부담스러운 감정 하나 필요 없는 대화. 


-그냥 그래ㅆ....뭐야, ‘나’ 어디 갔어.

--뭐? ‘나’가 왜.

기연은 침대 맞은 편 책상에 놓인 어항으로 갔다. 치렁치렁한 것들이 유독 그녀의 눈을 가린다는 생각에 기연은 겉옷을 벗어버리고 머리카락을 질끈 묶었다. 가슴을 넘어서는 길이의 머리카락은 새삼 그녀의 인내력을 테스트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가위로 자르고 싶지만 3년을 고생해 기른 것을 끊어내기란 쉽지 않았다.


--야 뭐야, 나 어디 갔어?

재촉은 기연을 어항 앞으로 데려갔다. 어항에는 아침까지 분명 구피 세 마리가 살고 있었건만 두 마리 뿐이었다. ‘가’는 지느러미가 화려하지 않지만 가장 몸집이 큰 암컷으로 지 새끼도 잡아먹는 잔혹한 놈이었다. ‘다’는 화려한 지느러미와 잘 빠진 몸매를 가진 놈이지만 ‘가’의 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는 제일 바쁜 놈이었다. 반면 ‘나’는 작고 지느러미도 화려하지 않은 ‘가’와 ‘다’의 새끼다. 기연이 가까스로 ‘가’에게서 '구출'한 ‘나’는 셋 중 눈이 많이 가는 녀석이었다. 지느러미가 작아 ‘가’와 ‘다’보다 느렸기에 먹이를 줘도 쉽게 먹지 못하고 어항 바닥 자갈과 분비물 사이에 내려앉은 것을 찾아 먹어야했다. 


 약육강식이라 했나. 어류의 세계는 이렇게 잔인한 것인가 할 정도로 ‘가’와 ‘다’는 ‘나’를 못살게 굴었다. 쟤 새끼를 먹어 치운 것으로 성에 차지 않는지 살아남은 ‘나’가 격리를 마치고 어항으로 돌아갔을 때부터 ‘가’는 교묘하게 ‘나’의 꼬리지느러미를 잡아 뜯었다. 기연은 내심 ‘나’가 이겨내고 성장하길 바랐던 것 같다. 그녀는 구피의 잔혹성을 알면서도 ‘나’를 어항에 돌려보내는 무리수를 던졌다. 욕심이었을지 ‘나’에게 바라는 것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가능하난 무관심으로 하지만 최소한의 제재를 가하기도 했다. 


-와... ‘나’ 죽었어. ‘가’랑 ‘다’가 잡아먹었나봐.

기연은 전화를 끊고 어항 앞에 앉아 한참을 바라보았다. 어항 바닥에는 먹이도 저들의 분비물도 아닌 것으로 추정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기연은 어항을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가’와 ‘다’를 일단 작은 어항에 옮겨 넣고 어항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나’에 대한 기연의 마지막 배려랄까. 혹은 ‘나’에 대한 기연의 반성이었을까. 


 ‘어항 밖으로 뛰쳐나와서 죽는 거랑 그 안에서 먹혀 죽는 것에 차이가 있을까.’


기연은 문득 이런 생각에 잠겼다. 뛰쳐나와도, 참아보려 해도 결국 죽는 것은 매 한 가지 아닐까. 숨을 쉬지 않아도, 숨을 쉬어도 결국 죽는 다는 것. 악착같이 버텨도, 다 놓아도 잃는 것은 다르지 않다는 것. 그녀의 오늘도 다를 것이 없었다. 이별을 경험하고 어떤 것에 손을 두고 손을 빼야할지, 혹은 다시 잡아야 할지. 시간이 지날수록 단호했던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이 흔들리고 못된 결정이었다는 말만 맴돌았다. 강하지 못한, 그래서 강한 척해온 지난 시간이 ‘나’가 먹히고 남은 찌꺼기와 닮아 있었다. 부스러기처럼 이곳저곳에 날리다가 바람에 쓸리고, 발바닥에 붙어 물에 씻기는 허무함까지도 말이다. 자신을 보호하고자 했던 선택이 하찮아 보였다.


 어항을 씻고 ‘가’, ‘다’를 집어넣었다. ‘나’가 없는 어항은 원래 ‘나’가 있었는지도 모를 만큼 평화 그 이상이었다. 그곳에 ‘나’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여긴 이제 ‘가’와 ‘다’ 그리고 기연이 남았다는 것. 그 뿐이었다. 그녀는 어항을 제자리에 두고 해진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 뭐하냐? 나올래?


 기연은 나가기 위해 검은 코트를 꺼내들었다. 보일러를 틀지 않아 입김이 나는 집 안은 방금까지만 해도 그닥 춥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까지 입고 있던 경량 패딩이 주는 답답함에 서늘함도 느끼지 못했다. 사실 가볍게 입어보려 무리하게 구매한 것은 그녀에게 맞지 않는 행보였다. 그녀에게 소비란 가장 합리적인 것, 무리라는 단어가 떠올라선 안 되는 것이었다. 또한 패딩의 색도 그녀가 그동안 선택하지 않던 색이었다. 그때 왜 연한핑크에 손이 갔는지는 그녀 자신조차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동안 그녀는 검정을 선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지하철에 줄줄이 앉아있는 검정색 중 하나, 그 평범함에 숨어있는 것을 선호했다. 어쩌면 그것 외에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하필 그날 연한 핑크색을 선택했다. 어둠이 묻은 자신의 옷들이 그날만큼은 손에 잡히지 않아 유독 추운 날이었음에도 그녀는 그 어떤 겉옷도 입지 못했다. 기연은 패딩을 옷장에 걸어 소매를 매만졌다.  


 그녀가 나왔을 때 해진은 이미 건물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해진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가까운 대형마트로 데려갔다. 둘은 딱히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지만 기연은 꽤 즐거운 눈치였다. 그렇지만 그녀의 답답함은 풀리지 않았다. 어쩐지 묵직하고 텁텁한 떡을 한 번에 삼킨 듯, 그럼에도 해진에게 이런 자신을 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진은 언제나 그녀를 꿰뚫고 있는 눈치였지만 기연은 기어코 마스크를 쓰고 나타났다. 그것이 유리 마스크인지도 모르고 겹겹이 썼지만 그녀는 이렇게라도 해야 안심하고 해진을 만날 수 있었다. 실없는 웃음은 가면을 쓰면 쓸수록 쉽게 만들어졌고 흘리는 모든 대화에 웃음을 붙일 수 있었다.


 -- 뭐가 웃기다고 웃어 웃긴.


 해진은 기연의 실없는 웃음이 항상 마음에 들진 않았다. 그녀의 이런 웃음은 언제나 텁텁한 모래 바람에 지나지 않아 목구멍에 칼칼하게 남아 붙다가도 후 불면 날아갔다. 진득한 웃음이란 없는 것이었다.


 해진은 기연이 더 이상 물고기를 키우지 않았으면 했다. ‘나’의 죽음이 오늘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더는 그녀의 영혼에 상처를 내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기연의 고집을 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에게도 힘듦을 내색하지 않는데 새로운 ‘나’를 사겠다는 마음을 누가 지울 수 있겠는가. 굳이 살 거라면 조금은 튼튼한, ‘가’와 ‘다’에 짓눌리지 않을 아이를 사갔으면 했다. ‘나’가 죽는 날이면 기연은 저 긴 검정 코트에 자신을 숨기고 죽음이 부르는 공허함을 집어 삼켰다. 발목까지 가리는 코트가 자신을 가려줄 것이라는 기연의 단순함은 그녀를 더욱 안쓰러운 존재로 만들었다. 그것은 녹아 사라지지 않고 코트에 가려지지도 않은 채 매번 그녀에 속에서 축적되어 왔다. 기연은 알면서 모르는 척, 새로운 ‘나’를 사면 사라질 것이라는 일종의 확신으로 수족관을 쥐 잡듯 뒤져 ‘나’에 어울리는 물고기를 찾았다. 


 --이건 어때?


 해진이 가리킨 물고기는 구피 중에서도 덩치가 큰 편에 속하는 아이었다. 하지만 기연은 참고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이미 ‘나’에 어울리는 아이를 찾아 만족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안 봐도 뻔했다. 어떤 말을 해도 듣지 않을 눈빛이었다. 기연을 일사천리로 그 물고기를 사서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그녀는 해진의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봉지 안에 담긴 ‘나’를 유심히 보았다. 누가 뭐래도 자신의 집에, 그 어항 속에, ‘나’라는 이름에 맞춤인 물고기였다. 이보다 더 어울릴 아이는 없을 것이다. 아마 이 ‘나’가 마지막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발걸음은 꽤 경쾌했다. 그녀의 코트 단추가 풀어져 바람을 타고 양 옆으로 휘날렸다. 분명 잘 잠갔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그럼에도 아랑곳 않고 그녀는 집으로 향했다. 찬바람이 이상스럽게 시원했다. 해진은 불만스러움은 접어두고 기연의 뒤를 따랐다. 그녀가 집 앞에 도착했을 즘,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


 A는 추위를 견딜 수 없었다. 최근에 감기를 심하게 앓은 후 그에겐 추위에 대한 병적인 도피가 생겼다. 단풍이 얼마 물들지 않은 초가을에 진입했을 때부터 패딩은 그의 필수 아이템이었다. 독하디 독한 감기를 제 힘으로 이겨내려 무식한 고집을 부렸건만, 2주 만에 맞은 수액은 그 모든 순간을 억지 부린 6살로 만들었다. 참혹하게 패배했으며, 그 패배가 불러온 후유증은 실로 끈질기게 뒤끝을 남겼다. 아렸다. 26년 참으로 허투루 살아왔다. 그리고 그가 하나 더 깨달은 게 있다면, 의학계의 발전이 대단히도 놀랍다는 것이다. 어쩜 저 별것도 아닌 화학용품의 결합체가 혈관을 타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떨리던 몸이 쉽사리 멈춘단 말인가. 정신적인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하지만 죽 한술 안 넘어가던 목구멍과 뱃속이, 그 순간부터 요동치듯 음식물을 원했다. 놀라운 발전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당시를 상상하자 담배를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꽤 성공적인 금연을 해왔지만 가끔 한 모금은 다이어트 중 치팅데이와 같은 역할을 했다. 


 -A 너 금연하는 거 아니었어? 의지가 이렇게 약해서 어떡해.

 -하하, 추워서요.


 간신히 꺼내든 변명이 추워서란다. 그는 스스로도 말 같지 않은 변명이 치졸하게 느껴졌다. 다만 그 대상이 김선배라는 이유는 생각보다 그를 덜 치졸한 인간으로 만들었다. 말대꾸도 하고 싶지 않은 인간상이 눈앞에 있다는 것으로도 이미 그는 재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럼에도 꾸준히 잔소리를 박아주는 김선배 덕분일까. A는 듣고 싶지 않은 말을 걸러내는 사회생활력을 갖추게 되었다.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A는 김선배가 뭐라고 말하던 입에 문 한 개비를 쉽사리 끄지 않았다. 한편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사실상 의지와 끈기는 그에게 기본으로 갖춰진 소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0살 때 그는 부모님을 조르고 졸라 장수풍뎅이 한 마리를 샀다. 물론 유충인 상태에서 구매했다. A의 부모님은 아이의 성장 과정에서 무언가를 기르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한편 과학적인 머리가 자연스럽게 생기길 바랐을지 모른다. A는 풍이라는 이름까지 지어주며 꽤 큰 애정을 풍이에게 선사했다. 학교가 끝나면 그렇게 좋아라 하던 슬러시도 사먹지 않고 집으로 곧장 향했고, 그 돈으로 풍이가 성충이 되었을 때 먹을 젤리를 샀다. 밤에는 잠들기 전 풍이가 빨리 장수풍뎅이가 되길 기도했다. 하지만 그는 풍이가 성충이 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어린 아이의 관심이 쉽사리 옮겨 가는 것은 예상 가능한 행보였다. 그는 친구들과 유희왕 카드에 빠졌고 동시에 풍이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다. A는 풍이가 톱밥이 아닌, 뚜껑에 붙은 스티로폼을 다 먹을 때까지 알지 못했다. 어느 순간이었지만 풍이가 담긴 통은 사라져 있었다. 그때부터 A의 부모님은 그가 무언가를 키우고 싶다고 말할 때마다 풍이의 비극적인 마지막을 읊어댔다.   


 중학생 때는 그 약한 의지가 그를 잡아먹었다. 3년 내내 갈팡질팡, 뭐 하나 제대로 해낸 것이 없었다. 흔히들 갖는 축구선수의 꿈을 우연히 꿨지만 이내 야구잠바라는 멋에 바람이 들었다. 하지만 야구에는 정말 소질이 없었다. 가까스로 경기에 나가도 공은 빠지기 바쁘고, 배트는 쓸데없이 날리기만 했다. 그가 감독님에게 야구를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1년 반 동안 본 감독의 얼굴 중 가장 생기가 있었다. 축구에서 야구로, 그리고 다시 야구에서 인문계로 옮긴 후 고민할 것 없이 가까운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아마 고등학교 때 사귄 친구들을 지금까지도 본다는 것. 그것이 그의 대표적인 의지가 아닐까 한다. 방황하던 시간들을 잡아준 그의 친구들. 축구와 야구를 넘어서는 본인들의 현란한 경험을 예시삼아 그를 붙잡던 친구들은 A에게 없던 의지를 삽으로 파 꼼꼼히 심어두었다. 


 -몇 장 없으니까 꼭 필요할 때 아껴서 써라. 필요할 때 한 장 뜯어서 삼키는 거야.


 A가 건네받은 일명 ‘의지노트’에는 각 장마다 ‘의지로 버티자!!!!!’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간혹 단순하게 ‘의지!!!!’ 혹은 ‘버티자!!!’라고만 쓰여 있는 페이지도 있었다. 손바닥에 들어가는 작은 노트였다. 아마 징글징글한 영어단어를 외우다 돌아버린 A의 친구가 자신에게 할 말을 적은 게 아닐까 하고 그는 추측했다. 지금까지 절반정도를 사용하면서 그는 ‘의지노트’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말아먹은 내신, 어디 내놓지도 못할 수능 성적표를 만회하기 위해 재수를 결심할 때도, 간신히 붙은 대학에서 적응하지 못할 때도, 심지어 금연을 결심할 때도 그는 의지노트를 한 장씩 씹어 삼켰다. 그리고 그 친구를 떠나보낼 때도 A는 의지노트 한 장을 씹어 삼켰다. 그때 쓰여 있던 문구는 ‘버티자!!!’ 이었다.   


 -- 뭐하냐? 나올래?


 다 핀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버릴 때 즈음 그의 전화가 울렸다. 우웅, 우웅. 어딘가 모르게 불안한 진동이 그의 마른 입술을 뜯었다. 전화를 받았을 땐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고, A가 물어볼 찰나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어졌다. 허무하고 공허한 말투,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목소리였다. 별안간 그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간 어떤 순간과 같은 기분이었다. 텅 빈 마음이 내뿜는 소리는 서리를 뿌렸고, 그의 마음 속 의지의 뿌리가 요동쳤다. A는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다 판단하고 급하게 택시를 잡아탔다.   


 15분에서 20분 정도 걸렸을까. 그가 도착한 곳에는 기연이 나와 있었다. 혼잣말을 하며 걷는 기연의 두 눈은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길을 잃은 어린 아이가 그곳에 방치된 채 자라버린 것처럼. A는 기연의 허리에 밧줄이라도 매달아 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밧줄이 있다면 혹여 그녀가 날아가더라도 붙잡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쩌면 절벽 끝에 걸터앉아 약한 바람이라도 불면 타고가려 할 것이다. 그는 혹시 모를 마음에 기연을 따라 걸었다. 그녀는 혼자 웃기도하고 때론 허공을 찰싹 때리기도 했다. 딱히 많은 말을 하진 않았지만 계속 옆을 힐끗 보다 앞을 보고, 다시 옆을 힐끗 쳐다봤다. 옆에 그 아이가 있는 것처럼.   


 기연은 집에서 약 5분 정도 걸리는 대형 마트로 들어가 헤맬 것도 없이 애완 물고기 코너로 향했다. 그녀는 수족관 속 물고기들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어떤 놈은 ‘가’처럼 몸집이 크고 튼튼해 보이는 암컷이었고, 어떤 놈은 ‘다’처럼 화려하고 날랜 수컷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딱 들어오는, ‘나’에 제격인 물고기는 찾기 쉽지 않았다. 몸집이 크지도, 지느러미가 화려하지도 않은, 자신의 작은 어항 속에서 살게 될 물고기. ‘가’와 ‘다’라는 무적을 끼고 살기에 죽음을 초연히 받아들인 지난 ‘나’와 다르지 않은 그런 물고기를 찾던 기연은 한 마리에 시선을 고정했다. 지느러미 한 쪽이 다른 쪽보다 조금 작아 더 많이 움직여 살아가는 아이였다. 언제 지느러미 질을 멈춰도 이상할 것 없는 물고기. 기연은 마치 오늘 구두를 끌고 어렵사리 집에 도착한 자신과 닮아 있음을 느꼈다. 이번 ‘나’가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과 함께 먹힐 수밖에 없는 먹이사슬의 최하층을 굳이 최상층의 입 안에 친히 모셔다 놓은 듯한 죄책감을 느꼈다. 아직까지도 인간으로써의 무언가가 남아있는 것인가 하는 한탄이 그녀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럼에도 그 아이가 아니면 ‘나’를 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그 ‘나’를 품에 안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지 않았다. 마트로 가던 길과 다르게 기연은 오직 ‘나’를 어항에 넣을 생각만 하는 것 같았다. 그런 기연을 A는 조용히 하지만 빠르게 뒤쫓아 갔다. 자칫하면 놓칠 수도 있을 것 같은 빠른 발걸음에 그는 기연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어쩌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 것이라는 추측, 혹은 확신이 그를 더 빠르게 기연에게로 밀었다. 그는 기연이 집 앞에 도착할 때 즈음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 너 여긴 웬일이야?


 그녀는 크게 놀라진 않은 눈치였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인사가 어색하게만 보였다. A에겐 외면하고 싶은 불안함이었기에 그동안 찾지 않았지만 그녀는 아직 그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듯 그의 존재가 자연스러워 보였다. 셋을 떠올리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녀의 시간도 멈춰있었다. 그만해라, 잊어라, 산 사람은 살아달라는 말은 그녀에게 통하지 않은 지 오래였다. 오히려 그것은 더 독이 되었다. 아직도 기연의 절벽에 걸터앉아 있었다. 누군가 밀어주길 기다리는 것인지, 스스로를 밀 명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무엇인가를 담는 것조차 포기한 텅 빈 눈은 A를 그녀의 뒤에 세웠다. 그는 주머니에서 의지노트를 꺼내 한 장을 찢어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녀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 그동안 못 와서 미안하다. 


 종이에는 ‘버티자!!!!’라고 쓰여 있었다. 그녀는 종이를 입에 넣어 씹어 삼켰다. 버티자, 버티자, 버티자. 과거 그녀가 A에게 자주 해주던 말이었다. 그에게 준 의지노트가 아직도 있다는 것이 손끝을 저릿하게 했다. 

 ‘없네.’

 기연은 주변을 둘러보다 무언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나’가 든 봉지를 테이블에 올려두고 다른 통을 꺼내들어 그 안에 ‘나’와 물을 집어넣었다. ‘나’가 든 통을 ‘가’와 ‘다’의 어항 옆에 두고 그녀는 코트를 벗어 옷장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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