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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약 Apr 19. 2024

아이만 바라보는 삶에 대하여

‘유별남’


자신의 아이를 유별나게 사랑하지 않는 부모도 있을까?

그럼에도 나에게 ‘너도 참 유별나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맞다. 나는 내 아이들이 너무 예뻤다. 그럼에도 곁에 있어주지 못해 그렇게 애틋할 수가 없었다. 그런 내가 유별난 거였을까? 

남들은 참 타인에 대해 쉽게 정의하곤 한다. 


엄마와 아이의 동일시


아이들과 온종일 함께 하는 요즘은 더더욱 아이들의 삶이 곧 나의 삶인 것처럼 인식되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그 삶을 살아가는 주체는 엄연한 타인인 아이들 본인이기에 매 순간 상황은 나의 뜻과는 다르게 흘러가고, 그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필요 이상의 감정을 소모하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는 아이들이 잠든 오후, 그나마 육체적으로 아이들과 분리되고 나면 그제서야 분리 된 정신이 돌아와 후회를 한다. 내가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누군가 나를 24시간 지켜보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그는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며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끊임없이 지적한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지만, 그렇다고 내 속 마음까지 100%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를 온전히 모르는 동시에 나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고 믿는 그가 나의 일과를 정해준다. 내가 아무리 원하는 것이라도 허락을 구하지 못하면 할 수가 없다. 나의 삶이 곧 그의 일이고 나로 인해 울고 웃는다. 심지어 나 때문에 자신이 살아가는 거라고 말한다. 


부모의 사랑과 희생은 끝이 없지만, 나만 바라보는 부모에 대한 자식들의 마음은 어떨까.


특히나 회피형 애착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끔찍한 일이다. 지금은 어쩔 수 없는 필요로 인해 엄마를 늘 곁에 두고 싶어하지만, 시간이 점점 흐를수록 내가 아이들만 바라보고 살게 된다면 아이들의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사실 나도 나의 삶을 살고 싶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성취를 느끼고 싶다. 하지만 아직도 하루 종일 엄마를 찾아대고 엄마가 없으면 여기저기 문제가 터지게 되는 아이들을 뒤로 할 강단이 내게는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결국 곁에서 사랑을 듬뿍 표현해주는 엄마로 살아가겠다 다짐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아이들이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더 이상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시기가 찾아오게 될 것이다. 육아의 목표는 자립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라난 아이들이 결국 자립하고 어엿한 성인이 되었을 때, 이 세상에는 중년 여성 하나가 덜렁 남게 되겠지. 이제 무얼하며 살아야 하나 걱정하면서...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나이 먹은 여자가 되어 있을 거라는 두려움은 좋은 엄마가 되고 싶은 나의 마음을 일순간 우울하게 만들어 버리곤 한다. 


그럴때면 때마침 걱정을 가장한 화살이 예고없이 날아와 가슴에 콕 박힌다.


“넌 언제까지 놀꺼야?” (내가 논다고?)

“야~ 애들은 큰다.”

“나중엔 엄마 찾지도 않아~”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공부를 좀 하는 게 어때?”


아이의 삶과 함께 버무려졌던 내 자아는 이제와 다시 물음표를 던진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엄마가 저한테 준 최고의 선물은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이었어요.”

“어떤 건데요?”

샐리는 곧게 앉아 표정에 활기를 띠고 자신의 엄마처럼 손가락을 흔들었다.

“뭐라고 하셨느냐면, 샐리, 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스스로에게 해야 할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란다. 우리가 그 질문에 스스로 대답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꾸만 대신 답을 하려고 난리들을 칠 거야. 절대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해!”

- 카르마 브라운, [완벽한 아내를 위한 레시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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