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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약 Jan 18. 2024

가방모찌

어떤 사람의 가방을 메고 따라다니며 시중을 드는 사람


숨 쉴 틈 없이 바쁜 워킹맘에게도 찬스쿠폰 같은 게 있다. 육아휴직. 아무리 육아만큼 힘든 게 없다 해도 워킹맘은 때때로 육아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삶을 동경한다. 보통 육아휴직은 아이를 낳고 바로 쓸 것 같지만, 일부러 아껴두었다가 초등학교 입학 전후에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오히려 유아기보다 더 엄마의 손길이 많이 필요하다는 이유다. 똥오줌도 가리고 의사소통도 가능할 만큼 키워놨는데, 초등 입학시기에 필요한 엄마의 손길이란 무엇일까.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은 3~4시쯤 하원하고 방과후수업까지 하면 오후 5시 이후까지도 돌봐주지만, 초등 저학년은 12시~1시면 하교를 한다. 게다가 아이들의 첫 사회생활이니만큼 친구도 사귀어야 하고 놀아야 하고 스스로 해야 하는 일들이 많아지는데, 1학년 꼬꼬마 아이들을 실제로 마주해 보면, ‘얘네가 학교를 다닌다고?’라는 생각이 들 만큼 아주 작은 아이들이다. 그러기에 초등학교 생활을 잘 시작하고 적응하게 하기까지 엄마의 손길이 너무 많이 필요하다.


출산휴가 3개월 조차도 마음 편히 다 못 쓰고 살던 엄마였기에, 우리 애들은 초등학교 가면 어쩌나라는 막연한 걱정이 늘 있어왔다. 그러나 역시 먼 미래의 걱정은 미리 앞당겨할 필요가 없다. 당장이라도 달라질 수 있는 게 사람 일이다. 어느 날 갑자기, 난 24시간 곁에 있어줄 수 있는 엄마가 되었다.


1학년 시기에는 거의 등하교를 같이 했다. 매일 아침 초등학교 교문 앞에는 아이 손을 잡고 등교하는 엄마들이 있다. 다정한 목소리로 인사하고 손을 흔들며 아이의 모습이 건물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목을 빼고 바라보는 엄마들.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가끔씩 엄마들과 함께 공원을 산책하거나 카페에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는 일상을 보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간 오전시간은 늘 생각보다 빨리 지나갔다. 어질러진 집안을 정리하고 미뤄두었던 집안일 한두 가지를 끝마치기도 전에 하교시간이 된다. 서둘러 다시 교문 앞으로 달려가면 엄마들이 삼삼오오 모여 아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아이들을 기다리며 엄마들은 아이들의 학교생활이나 학원정보, 육아 고충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렇게 오가는 대화는 ‘어머어머~ 정말요?’라며 호들갑을 떨지만, 실상 크게 중요한 얘기들이 오가지는 않는다.


엄마의 일이란, 아이들이 하교를 하면 그대로 집으로 데리고 오면 되는 간단한 일이 결코 아니다.

몇 날 며칠 이러한 생활을 반복해보고 난 후 나는 깨달았다.


‘아… 아이를 초등학교에 입학시키면 엄마는 가방모찌가 되는 거구나.’


교문을 나서자마자 아이들은 입고 있던 겉옷과 책가방, 실내화 가방을 아무 데나 집어던지고 우르르 어딘가로 뛰어간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사이에 무리를 잃고 친구를 찾아 헤매는 친구들도 발생한다. 이미 나와서 뛰어가버린 친구, 그 아이를 쫓아 뛰어가는 엄마, 학원 안 가고 놀면 안 되냐고 떼쓰는 아이와 난감한 엄마, 아직 나오지 않은 친구를 기다리는 엄마들까지 한 데 뒤엉켜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엄마들은 서로의 행선지를 다급하게 공유하고, 내동댕이쳐져 흙투성이가 된 가방과 옷을 서둘러 짊어지고 아이들을 따라 달려가야 했다. 공원에 풀어놓은 아이들이 다치지 않고, 또 누구 하나 울지 않고 정답게만 노는 일은 좀처럼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코로나를 겪으며 집 안에서만 끼고 키웠던 우리 집 아이들은 초등학교 입학 후 친구들과 바깥에서 노는 일에 눈을 뜨자,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처럼 날뛰었다.


모여 앉은 엄마들은 아이들을 훌륭한 사람으로 잘 키워내기 위한 고민들과 주로 학원 등의 교육 문제에 열을 올렸지만, 정작 그 옆의 당사자들은 마치 원시인처럼 땅을 파거나, 나무나 돌을 두드리거나, 개미를 잡거나, 놀이기구나 나무, 울타리 위에 올라타거나 했다. 그나마도 아들 엄마들은 맘 편히 수다에 집중할 수도 없다. 아이들의 가방을 들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아이들에게 안테나를 바짝 세우고 어느 순간에 개입해야 할지 또는 참아야 할지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저 높이의 나무는 올라갔다가 다칠 수도 있을 텐데… 저 크기의 돌을 손에 들고 있다가 잘못 던져지면 누군가 맞을 텐데… 아이들의 놀이에 너무 일일이 개입하는 건 아닐까 고민하는 사이 엄마의 안 좋은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 않았다. 그렇게 다치면 밴드를 붙여주고, 싸우면 중재를 해주고, 목이 마르면 마실 것을 갖다 주는 식의 일을 한다. 그 정도면 다행이지, 노는 것도 서투른 아들 덕에 하루가 멀다 하고 구급차에 실려 가기 일쑤였다.


에너지가 넘치는 우리 아이는 모든 친구들이 다 떠나고 혼자 남을 때까지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원 없이 놀았다. 그렇게 매일 몇 시간이고 가방모찌가 되어 아이를 따라다니는 일상을 보냈다. 해가 저물어 가는 시간, 아이를 겨우 설득해 지친 몸으로 아이의 가방을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이미 체력이 바닥나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한다. “네 가방은 네가 메는 것이 맞다”며 책임감 교육을 운운했지만, 사실은 체력이 받쳐주지 않는 엄마의 비겁한 짜증일 뿐이었다. 그렇게 아이와 싸우며 집에 도착하면 현관 앞에서 아이를 붙잡아 모래로 뒤범벅이 된 옷부터 탈탈 털고 곧장 목욕탕으로 아이를 밀어 넣는다. 후다닥 목욕을 시키고 부랴부랴 저녁 식사를 준비해야 한다. 아직도 아이들 식사 예절이 엉망이라 밥을 먹는 건지, 장난을 치는 건지 매일 식사 시간이 고역이다. 세월아 네월아 한 시간이 넘게 밥을 먹는 둘째. 숟가락이며 젓가락을 계속 떨어뜨리고 물을 엎지르고… 얘기를 하느라 밥 먹는 건 잊은 건지… 그쯤 되면 매일 식사 자리에서 도망가고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만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나는 ‘가방모찌’를 하러 집을 나섰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시계 토끼를 따라 뿅 하고 빠져 들었던 이상한 세계 같은 이곳에서 나는 매일 아이들의 가방을 끌어안고 허둥지둥 뛰어다녔다.


그랬다. 내가 동경했던 전업맘의 삶은.


아이들 곁에 머무는 엄마. 원 없이 함께 해주고, 손길이 필요할 때 늘 뒤치다꺼리를 해줄 수 있는 엄마.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난 비즈니스의 성공을 약속하거나 마케팅 전략을 논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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