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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lluda Jul 12. 2020

두려움의 다른 뜻은 설렘이었다

엄마였다.
내게 두려움이란 단어의 끝에 늘 서 있던 사람.
형 만한 아우가 없다는데 동생들보다 못한 형으로 살면서, 내가 늘 잘 보이고 싶었던 사람.
바로 우리 엄마였다.


엄마,
아마 엄마는 상상도 못 할 거야.
내가 엄마에게 항상 결핍을 느꼈다는 걸.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엄만 애써 자식 키워봐야 아무 소용없다고 할지도 몰라. 가족을 위해, 자식들을 위해 엄마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자라면서 다 봐 놓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느냐고 서운해할지도 몰라.
그런데 엄마, 난 살면서 엄마를 온전히 가져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아. 홀시할아버지에, 홀시어머니 모시고  자식 셋 키우느라  엄마는 늘 바빴으니까. 언제나 해야 할 일들을 뒤에 달고 살았으니까.

어릴 때 우리 집은 식구가 참 많았어.

증조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삼촌, 그리고 우리 셋까지. 그때  4대가 한 집에 사는 사람은 내 친구 중에 나밖에 없었던 것 같아. 그래서였을 거야. 엄마는 나를 보면서 늘 다른 것을 함께 보고 있었고 그래서 난 엄마와 함께 있으면 항상 불안하고 두려웠어. 내게 할당된 엄마의 시간은 나를 허기지게 했고 엄마가 보고 있는 다른 것에게 엄마를 빼앗길까 봐 불안했어. 하지만 어린 마음에도 해야 할 일들을 줄줄이 사탕처럼 달고 사는 엄마의 뒷모습이 너무 힘들어 보여 나까지 엄마 등을 내 달라고 조르지는 않았던 것 같아. 그때부터였나 봐. 엄마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것이. 내가 뭐든 잘하면 내게 할당된 엄마의 시간이 조금 더 길어진다는 것을 알았거든. 그래서 학교에 가면 상을 받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든 없든 무조건 손을 들었어.


초등학교 4학년 때였을 거야.
선생님께서 웅변해 본 적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하셨어. 난 웅변 학원에 다녀본 적도 없고 웅변이 뭔 지도 잘 몰랐지만 손을 들었어.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께서는 웅변할 친구들을 모아 준비해 오신 원고를 보며 한 명 씩 해 보라고 시키셨어. 6.25 웅변대회였으니까 여름이었는데 가슴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 들며 등에 한줄기 식은땀이 났어. 엄마를 보며 느꼈던 두려움과는 또 다른 느낌의 두려움이었어.

그때 알았지.

세상에는 두려움의 종류가 참 많다는 것을.

다행히 내 차례는 거의 끝이어서 다른 아이들이 웅변하는 모습을 보며 머릿속으로 계속 따라 할 수 있었어. 아이들은 웅변 학원에서 배운 모든 기술들을 선생님 앞에서 펼쳐 보였고, 난 그 아이들을 보며 내게 맞는 기술들을 하나씩 따라 했어. 지금 생각해보면 내 인생 최고의 일 대 일 과외수업이었어. 그렇게 선생님 앞에서 오디션을 보고 예선을 통과한 후 매일매일 연습한 끝에 난 학교 대회에서 우승을 했어. 그리고 구청 대회 본선 진출까지 해서 내게 할당된 엄마의 시간을 좀 더 가져올 수 있었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그 웅변대회를 통해 난 두려움은 또 다른 두려움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엄마를 향한 두려움이 내게 가져다준 것이 하나 더 있어.
거짓말.

공부를 안했던 것도 아니고 못했던 것도 아닌데 동생들은 나보다 늘 성적이 좋았었어. 난 엄마에게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제외한, 성적표에 안 들어가는 시험은 무조건 백점이라고 거짓말을 했지. 그래서 성적표를 받으면 평소 실력보다 시험을 못 보는 아이가 돼버린 거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시간과 노력을 오래 들이지 않고도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어서 난 종종 엄마에게 거짓말을 했던 것 같아. 나중에는 어떤 것이 거짓말이었는지 나도 헷갈릴 정도로.
사춘기를 지나면서 내게 할당된 엄마의 시간마저도 갖고 싶어지지 않게되면서 내 거짓말 세상도 끝이 났어.
엄만 이제 시간이 생겼는데 난 더이상 엄마의 시간이 필요없어진 거지.
나중에 알았지. 내가 엄마가 되고 나서.
그때 엄마는 나의 거짓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아이의 숨소리도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하는 엄마들은 아이가 하는 말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정도는 다 알 수 있다는 것을.
돌이켜보니 엄마에게 고마워. 엄마 때문에 작가라는 직업을 엄두도 못냈지만 그래도 내가 지금 이렇게 글을 끄적이고 있는 것은 어쩌면 그때 그 거짓말 덕분일지도 모르니까.


작가.
고등학교 2학년 때였어. 내가 작가나 되고 싶다고 하니까 세상에 할 게 없어 글쟁이가 되려고 하냐고  엄마가 막 화를 냈어.

엄마는 내 꿈이 선생님이었다고 알고 있지?

엄마,  내 꿈이 국어 선생님이었는지 알아?

내가 국어 선생님 되겠다고 할 때, 엄마가 아무 말도 안 했기 때문이야.  엄마가 아무 말을 안 한다는 건 동의한다는 뜻이잖아. 선생님 말고 두 번째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생겨 엄마에게 말하고 된통 혼이 난 후로 작가는 내가 가질 수 없는 직업이었어. 그래서 그때부터 종이가 아닌 마음에다 글을 썼던 것 같아. 마음에 쓰는 글은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아서 참 좋아. 부끄럽지가 않거든. 가끔 마음에 쓴 글이 드러나 얼굴이 달아오를 때도 있긴 하지만..

엄마, 가르치는 것은 나와 참 잘 맞는 직업이었던 것 같아. 가르친다고 하지만 가르치면서 참 많이 배웠어.
그렇게 아주 오랫동안 내 이름 앞에 선생님이란 수식어를 달고 아무도 모르게 이름 뒤에는 작가라는 단어를 매달고 살았어. 그런데 엄마,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 같아. 늘 내 이름 석자 뒤에 있던 작가라는 말이 꿈틀 대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바빠서 잊고 지냈던 두려움이란 단어가 생각난 거야. 두려웠어.

있는 지식 곶감 빼먹는 것처럼 하나하나 빼먹다 보니 더 이상 가르칠 것도 없는데 이미 내 가슴은 화석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았거든.
그때 알았어. 내가 버는 돈은 내가 화석이 되어가는 대가라는 것을. 내가 나에게 쉼을 주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쉬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떠난 거야.
아무 연고도 없는 낯선 나라 캐나다로.
언제나 뒤에서 따라다니던 내 인생의 꼬리표를 떼어 내 이름 앞에 당당하게 달고 싶어서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색깔 다른 두려움을 온몸으로 떠안은 거야.
몰라서 떠날 수 있었던 것 같아. 모르면 사람이 용감해지잖아. 아이 하나 데리고 준비 없이 떠난 남의 나라살이가 날 위해 준비하고 있던 실체 없는 두려움. 그것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무서운 거였어. 엄마, 그곳에 살면서 가장 두려웠던 것이 뭔지 알아? 그건 바로 언어였어. 남의 나라에 살러 가면서 그 나라 언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예의 없는 내게 언어는 정말 두려움 그 자체였던 것 같아. 처음엔 어느 곳을 가도 친절하게 웃어 대는 캐나다 사람들을 보며 나도 무작정 웃었어. 이런 것이 바로 선진국의 문화라고 생각하며. 그런데 그런 그들이 얼굴로 웃으면서 입으로 욕을 하더라고. 들어도 모른다는 말. 나를 두고 한 말이었어. 그걸 처음 안 순간 얼마나 무섭던지.
그 후로 기를 쓰고 아이 학교 보낸 다음 영어 공부하는 곳을 찾아다녔어. 그리고 닥치는 대로 마음에다 쓰던 글들을 종이에 쓰기 시작했어. 그런데 엄마, 신기하게도 써지는 거야. 나도 모르게 글이 써지더라고. 그렇게 남의 나라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바쁘게 살았어. 언제나 자정 넘어 자서 새벽 6시에 일어나는 나를 보며 태니가 그러더라구.
"나는 오늘 자면 내일 일어나는데, 엄만 오늘 자서 오늘 일어나네!"
난 낯선 곳에서의 두려움을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극복하며 살고 있던 거였어.
그렇게 내가 가진 모든 장점들을 총동원해서 서서히 내가 이곳에 온 이유에 적응해 가고 있을 때쯤 엄마가 말했어.
일 년이나 돼가는데 이젠 들어와야 하지 않냐고.
가족이 너무 오래 떨어져 있으면 안 된다고.
난 이제 시작인데 끝낼 때가 되었다는 엄마의 말.
잊고 지냈던 어릴 때의 그 두려움이 생각났어. 그 속엔 무조건 엄마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던 어린 시절의 내가 있었어. 서운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그렇게 며칠을 보내다가 엄마에게 편지를 썼어.
답장은 받지 못했지만 난 엄마가 '대답 없음'으로 나를 이해했다고 믿어. 대답 대신 엄마는 김치를 소포로 부쳐줬으니까.


엄마 그거 알아?

엄마가 가르쳐 준 두려움의 또 다른 말.
그건

설렘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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