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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lluda Oct 31. 2020

바람이 지나간 자리


딸 낳으면 서운하다는 생각이 드는 시대에 너희들을 낳고

딸 없으면 서운하다는 생각이 드는 시대에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이 참 새로워.

시간은 언제나 흐르고 있었어. 너희와 함께 해서 행복했던 시간들이었지.


- 너희 때문에 힘들지 않았냐고?

아니, 너희 덕분에 힘들지 않고 살았지. 엄마는 니들 보고 살았어. 세상에 바람피우고 도둑질하는 것 빼고 안 해 본 일 없이 하면서 살았지만, 엄만 니들 덕분에 행복이란 말 옆에 두고 살았어.

처음에 살던 신혼집에서 이곳으로 이사 와보니 이 동네가 과수원이 많아서 그런지 잘 사는 집들이 꽤 더라. 우리야 잘 사는 집은 아니었지만 니들 기 안 죽게 하려고 엄마 참 부지런 떨고 살았어. 새벽에 동대문, 남대문 시장 가서 옷장사인 것처럼 큰 가방 메고 여기저기 돌아다녔어.

그래야 도매로 싸게 살 수 있거든. 이쁜 것 있으면 하나씩 샘플로 가지고 간다고 하고 싸게 가져오고. 아니면 옷감 떼다가 집에서 재봉틀로 만들어 입히고. 그 덕에 니들 옷 하나는 잘 입고 다녔지.

- 또래 엄마들 안 부러웠냐고?

부러울 새가 어딨어. 동네가 애들 키우며 사는 집이니까 다 내 또래 엄마들이었어. 꽤도 극성맞은 엄마도 많더라니. 학교 가서 아주 살다시피 하는 엄마들도 있었으니까. 그땐 반장 하려면 애가 아니라 엄마에게 먼저 물어봤어. 얘 반장 뒷바라지해 줄 수 있냐고. 언젠가 네 담임 선생님께서 또 물어보시길래 엄마가 일 년 아주 작정을 하고 도와준다고 했지.

너 기죽을까 봐.딱 그 일 년이었어.

네 동생들은 바빠서 더는 못해줬어. 그런데 니 동생은 엄마가 학교에 잘 가지도 않았는데 초등학교 5년 내내 반장을 하는 거야. 걔가 어릴 때는 활동적이고 리더십도 있어인기가 많았어. 그랬는데 왠 일인지 6학년 때는 기권을 하고  반장을 안 하더라고. 그래서 그냥 이제 하기 싫은가 보다 했는데 어느 날 나에게 그러더라.

그때가 아마 봄소풍 갈 때였을 거야.


"엄마, 소풍 갈 때 막내 담임 선생님 도시락 좀 싸드리면 안 돼?"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엄마, 내가 6학년 때 반장 선거 기권했는지 알아?"


"계속 반장 해서 이제 하기 싫은 거 아니었어?"


" 엄마, 일 년만 더하면 6년 내내 반장인데 내가 안 하고 싶었겠어? 하고 싶었는데 무슨 행사 때면 다른 반은 반장이 거의 선생님 도시락을 싸는데 우리 반만 부반장이나 다른 애 엄마가 쌌잖아. 그냥 그게  그랬어."


니들 모두 임원이라 선생님 도시락 걱정을 안 한 건 아니지만 집에서 싸는 김밥처럼 선생님 도시락을 쌀 수도 없고 또, 반마다 선생님들 도시락 전담하는 학부모들도 있고 해서 엄마는 선생님 도시락은 신경을 안 썼지. 물론 니들이 싸 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었고.

너도 애 키우니 알겠지만 큰 애는 처음이니까 뭔지 모르게 더 신경이 쓰이고 기대도 있고 그러잖아. 둘째는 아무래도 좀 덜하고. 그때 그 말 듣는데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겠더라니까. 그 어린것이 혼자 말도 없이 아무 내색도 없이 5년을 보내고 이제 지 동생이 자기처럼 신경 쓰일까 봐 이제서야 얘기를 한 거라 생각하니, 한편으론 대견하기도 했지만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


소풍 도시락 세 개에 식구들 먹을 것까지 싸고나면 남은 김밥 꼬다리만 수북히 쌌였지. 소풍 가는 날은 하루 종일 김밥 꼬다리 먹는 날이었어.


니들 셋 키우며 순간순간 말 안 들어 속상하고 힘들었던 적이 왜 없었겠냐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잘 생각이 안 나.

그런 건 그냥 잠시 부는 바람이었던 것 같아. 먼지 거두어 가는 바람. 그래서 바람 지나간 깨끗한 자리만 엄마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거지. 니들도 이제 자식 다 키우고 나면 바람 지나간 자리에 서게 되겠지. 그 자리에 서게 되면 알 수 있을 거야. 바람이 가지고 간 것들을.

엄만 니들이 잘 커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아들, 딸 삼 남매 나서 대학까지 다 보낸 건 이 동네서 엄마 딱 하나야. 엄마는 자식 농사 성공했어.


바람이 불어야 씨앗이 날아가 앉을 자리를 잡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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